어떤 문중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 문중사학이 아직까지 ‘가문의 영광과 성공한 인물’에만 집착하고, 문중 인물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문에 전해져오는 아름다운 전통과 빛나는 공적까지도 ‘가문 내의 역사’로 사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장되어 묻힌 우리 역사의 보배를 찾아 갈고 닦는 것 또한 역사학도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2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김해김씨를 비롯한 가락허씨, 인천이씨 등 가락성씨의 족적을 통해 그들 명문가로서의 행적을 살펴보고, 가문과 뿌리에 대한 긍지와 자긍심이 후손들에게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반추해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한 가문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 비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p.7, ‘저자의 글’ 중에서
『삼국지』의 기록은 발달된 문명을 가진 세력이 집단으로 이 지역에 이주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들은 이주민 집단일 가능성이 많다. 구간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이 있는 지역에 수로로 대표되는 새로운 집단이 출현했다면 충돌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가락국기」의 기록은 수로왕 집단과 토착 세력이 충돌하기보다는 토착 세력이 수로왕 집단의 출현을 반기고 있음을 전해준다. 이는 수로왕 집단이 압도적인 무력을 갖고 있거나 토착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우수한 선진문명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한 현상이다. 가락성씨의 가장 주요한 특징인 융합 전통이 이미 수로왕 건국사화에 반영되어 있음을 뜻한다. 수로 집단은 낙동강 하구 지역으로 들어와 토착민과 융화하며 왕으로 추대되고 가락국을 세워갔던 것이다.---p.20, ‘가락김씨의 탄생, 김수로왕’ 중에서
허왕후가 온 아유타국을 현재 인도의 갠지스 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 근거는 김해 김수로왕릉의 유적과 아요디아 지역 유적들의 동질성에 있다. 김해 김수로왕릉 정문 단청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 ‘활’, ‘연꽃 봉오리’, ‘불탑’ 문양이 그려져 있다. 또한 능의 중수 기념비에는 풍차 모양의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문양들은 아요디아에서 지금도 큰 건축물에 흔히 쓰이고 있다. 따라서 허왕후는 이곳에서 갠지스 강을 타고 내려와 바다를 따라 동중국해를 지나 김해에 도착했다는 주장이다.---p.44, ‘가락허씨의 시조, 허왕후’ 중에서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왕후가 되어 문무왕을 낳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가락국은 최소한 신라왕족의 외가인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신라 문무왕 이후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신라 문무왕이 외가의 조상인 수로왕을 종묘에 모신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p.60, ‘가야와 신라의 은원’ 중에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그의 부친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부인이 법흥왕의 딸 아양공주인 덕분에 진골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현은 진골이 되었으나 서라벌에 기반을 둔 정통 진골들은 가야왕실 출신의 진골들을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 형식은 같은 진골이지만 가야계 진골과 서라벌계 진골 사이에는 계층이 그어져 있었다. 김유신의 출생지가 신라 북쪽 변방 만노군(현재 충청북도 진천인 것 자체가 가야계 출신들의 신산스런 삶을 말해준다.---p.89, ‘신라를 장악한 가락의 후예들’ 중에서
가락국의 옛 수도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다. 가락국을 금관국金官國 또는 금관가야로 부르면서 그 지명이 점차 변천되었는데 금관군, 금관소경金官小京, 임해현臨海縣, 금주金州, 금녕부金寧府, 금주목金州牧 등으로 여러 차례 고쳐 불러오다가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金海府가 설치됨으로써 수로왕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한 것이다. 김해김씨 계보는 가락국의 김수로왕 이래로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을 지나 구형왕까지 10대가 이어 진다. 42년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이후 구형왕이 532년 나라를 신라에 넘긴 때까지 계산하면 10대 491년이다.
---p.111, ‘김해김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