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그 4년 후의 이야기
컨텐츠팀 홍수연(hautehong@yes24.com)
우익정당 13%-1위
중도정당 9%-2위
좌익정당 2.5%-3위
그/리/고 70% 이상이 백지.
비가 오던 어느 투표일, 한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조직, 단체와 상관없이 모두 한 마음으로 백지투표를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데, 무효, 기권 없이 백지투표를 70%이상 얻는다면, 그 선거의 효력은 어떻게 될까? 아마 정치/언론인들은 학계에 자문을 구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과연 이러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발생했을 때, 과연 소수의 유효표를 전체의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제도적인 방안을 찾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발칙한 상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노벨상을 탄 대작가에게 ‘발칙한 상상’이라는 말을 내가 감히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정치적 상상력과 현실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잠시나마 나의 ‘발칙한 공상’을 만들어준 그에게 우선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주제 사라마구는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작가로 뒤늦은 조명을 받았으며, 평소에도 출신성분(?)에 맞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 책은 현대 대의 민주정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상상력을 아우르고 있다. 앞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백색 실명에 따른 공포를 그리고 있었다면, 그 4년 후 같은도시에서 일어난 일종의 백색 정치 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우익, 중도, 좌파를 넘어 모든 ‘정치권’은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가관인것은 국민을 위한 조직인 정부가 비밀경찰을 투입하고,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여 거짓말 탐지기로 시험하는 등, 국가기관이 국민을 향해 전선을 그어버리고, 보이지 않은 백색 조직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급기야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도시의 관문을 폐쇄하였다.
과연 이 백색 투표는 누구에 의해 조직된 것일까? 정부는 일종의 배임(背任)으로 도시에서 모든 정부 조직을 빼낸다. 마치 백지투표에 반발이라도 하여, ‘너희가 우리를 거부했으니 그 속에서 얼마나 잘 사는가 두고 보라지, 흥!’과 같은 질투처럼 말이다. 뒤이은 은폐된 테러 공작과 무의미한 죽음. 시민들의 분노와 추모가 이어진다. 심지어 우익 정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탈출을 받아들이고,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을 다시 도시로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시민, 대중, 다중, 민중(그 무엇이건 간에.)의 유연성과 포용력에 정부는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다. 이제는 관료들조차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이쯤 다시 한 번 묻는다. 백색 투표는 누구에 의해 조직된 것일까?
‘내가 위정자라면 이런 난감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저자의 해답지를 읽어 내려간다.
그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투서 한장. 고결한 시민들의 비조직화된 조직적인 행동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정부의 대통령과 고위 관료 앞으로 배달된 편지에는 그 어느 누구도 암묵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던 4년전 백색 실명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이가 자유롭지 않았기에, 아무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백색 실명의 시기, 홀로 눈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녀는 7명 남짓의 무리를 이끌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또 사람을 살해하였다고 남자는 고백한다.
오호. 자작극 테러로도 통하지 않았던 상황을 타개할 만한 회심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정부는 그 여자를 찾는다. 그녀는 4년전 두 번째로 눈이 멀었던 의사의 부인으로, 남편을 지키고 한 무리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모두가 인간성을 상실한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홀로 도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가 이제 정부에 의해 반정부 백색조직의 수장으로 '포장'된다. 단지, 홀로 실명을 겪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우리의 ‘빨간색’에 대한 알레르기 만큼이나 책 속의 정부도 ‘흰색’에 대한 공포도 대단한데, 정작 시민들이 왜 백지투표를 던졌냐에는 관심이 없고 국면을 전환할 카드를 통해 급한 불 끄기에만 여념이 없다. 정부는 자신에 우호적인 신문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터뜨린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과 일상성을 박탈당한 그녀, 그리고 그녀를 암살하는 전직 총리.
정치는 언제나 코미디 연극 무대였고, 시민들은 알면서도 모른척 당하거나 아니면 진정 모르는 관객이었나?
개 짖는 소리가 싫다는 암살자의 독백으로 이 책은 끝난다.
선거일의 백지투표가 모인 것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또 과거와는 다른 시민들의 비조직화된 자발적인 응집력을 점지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사고의 유연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정부의 해결책이 고작 4년 전 살인을 했던 의사 부인을 용의자로 지목쿇고 그녀를 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대목을 통해 언제나 ‘근본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하는 언론과 늘 ‘임시방편책’으로 애두르는(혹은 이럴 수밖에 없는) 정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두 눈을 뜬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어디일런지. 이를 결정하는 것은 저자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결국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