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백사장을 걸어서 인가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 앉았다. 파도가 거품을 숨겨 가지고 와서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 밑에 그것을 뿜어 놓았다. ?선생님.? 여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저 서울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여자의 손을 달라고 하여 잡았다. 나는 그 손을 힘을 주어 쥐면서 말했다. ?우리 서로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거짓말이 아니예요.? 여자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개인 날> 불러 드릴께요.??그렇지만 오늘은 흐린걸.?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본문 중에서
젊고 부유한 미망인과 결혼하고 곧 제약회사 전무가 될 서른세 살의 윤희중. 그는 아내와 장인의 권유로 어머니의 묘가 있고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무진으로 향하다. 짙은 안개가 명물인 무진. 무진에 온 날 밤, 중학교 교사로 있는 후배 ?박?을 만나 그와 함께 지금은 무진의 세무서장이 된 중학교 동창 조만수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인숙?이라는 음악선생을 만나게되는데…….
모든 것을 은폐하는 안개의 이미지가 소설 전체를 압도하는 《무진기행》. 이 작품은 1967년 작가 김승옥 자신이 시나리오로 각색해 <안개>(감독 김수용)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 산업화가 급격히 진전되면서 비롯된 여러 사회 병리적 현상들, 즉 배금주의, 출세주의, 도시지향성 등을 안개 자욱한 무진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의 허무주의적인 시각과 함께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윤희중은 일상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일상으로 회귀하는 보편적 인간심성의 소유자이다.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그의 갈등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본문 중에서
김승옥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상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윤리와 무책임성도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 세계의 지배 질서를 따르는 삶과 그 반대쪽이나 바깥에 서고자 하는 지향성 사이에서 찢긴 젊은 혼의 방황을 그린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짧은 방황을 거쳐 현실세계의 지배 질서에 안기고 만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순수하면서도 불순하며 한 시대 젊은 세대의 본질 하나를 깊이 반영하는 소설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