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되긴, 당신이 해달라는 데로 했지. 내가 언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의 청을 거절한 것이 있던가? 난 당신의 노예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던졌다.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에요. 세상에서 제일 이해심 깊고 현명하고 똑똑하고 인정 많은....'
'노예지. 그래봐야 난 당신의 노예에 불과하다니까.'
--- p.437
라일라의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침묵뿐이다. 이스말의 눈시울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에.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마디 거짖으로 가득 찼던, 이제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의 심장에 담겨 있던 단 하나의 진실.
'쥬 뗌므(사랑해).' 그가 무력하게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라일라.'
그녀는 절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척 외면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빠. 프란시스. 앤드루 아저씨. 그리고 이 남자. 아름답고 믿어지지 않는, 자신의 그 무엇-명예, 자존심, 신뢰-이라도 다 주었을 이 남자를. 이 남자 앞에선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몸이건 영혼이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주었다. 그것도 기꺼이. 그 역시 그녀를 기쁘게 했고, 그녀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몸과 영혼을 주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서 그가 상처받았음을 보았다. 자신이 저질렀던 끔찍한 일을, 그가 자신의 입으로 고백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예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 때문에 너무도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서로에게 공평해지도록 노력해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경직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그 손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오래 전에 당신에게 말했어야 하는 건데, 너무 두려웠어.' 그가 맞잡은 손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야. 당신을 잃는다는 거, 견딜 수가 없었어. 하지만 오늘밤만큼은 내 위치를 참을 수가 없었어. 당신을 위로해 줄 수도, 집까지 바래다 줄 수도 없었어. 당신이 악몽을 꾸며 괴로워할 때 역시 달래줄 수 없잖아. 내 여자 하나 보살필 수 없다는 게 화가 나. 당신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수 없다는 것도 싫어. 내가 당신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기까지는 당신에게 결혼하자고 조를 수도 어를 수도 없다는 게 화가 나. 내겐 이토록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야.'
--- pp.410-412
그는 몇 센티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뱃속이 울렁거리며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힘과 의지력이 약해진 내색을 하면 남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그자를 만나지 마."
프란시스가 말했다.
"피오나도 안 돼."
"당신에겐 나보고 누굴 만나라 마라 명령할 권리가 없어요."
"권리 따위 내가 알게 뭐야? 내가 말하면 당신은 무조건 듣는 거야!"
"그러는 당신은 지옥의 유황가마에서 불타버려! 내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 매춘부와 놀아나는 짐승의 명령 따윈 듣지 않겠어!"
"독사의 혀를 가진 위선자! 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뒀더니―침대에서 날 거부해도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이제 이런 짓을 해? 그 자식에게 다리를 벌려주려고 서리로 간 거지?"
"그 더러운 입 닥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서 곤드레만드레 취할 때까지 술이나 처마셔! 그렇게 좋아하는 독약이나 더 먹어! 약과 술에 취해 죽어버려! 날 좀 내버려두란 말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