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잉크를 사용해 원고를 직접 쓰고 초고에 줄을 그어대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를 꼭 만나야 했다. 우린 그의 주방에 나란히 앉았다. 마치 잃어버린 중세의 공예술을 간직한 누군가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의 작업엔 연금술과 채집술, 위법의 냄새를 풍기는 불을 활용한 제약술이 뒤섞인 듯했다. 우린 매번 로건이 끓인 맛있는 스프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는 바로 그 식탁에 앉아서 최근에 그가 새로 만들었다는, 대단히 아름답고 하염없이 오묘한 색감을 지닌 미지의 잉크를 들여다보곤 했다. (마이클 온다치) --- 「책머리에」 중에서
7년 후에 나는 가정을 꾸리려고 토론토로 돌아왔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가, 날마다 가로지르는 공원에서 아름다운 고목이 자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나무가 흑호두나무인 걸 깨닫자마자 독특한 옛 잉크에 대한 기억이 밀려오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아이들과 독성 없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고, 나무에서 채취해 만들 수 있는 미술 재료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때는 봄이었다. 그건 몇 달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단 뜻이었다. 호두는 겉껍질이 녹색으로 변할 때까지 충분히 익고 천천히 자라나 9월 말에야 겨우 떨어질 터였다. 이것이 잉크에 대해 체득한 나의 첫 교훈이다. 잉크의 첫 번째 성분, 그건 바로 인내심이다. --- 「서문」 중에서
겨울은 색 채집자들에게 몇 가지 독특한 이점을 준다. 한겨울의 잿빛과 새하얀 풍경이 색과 극적으로 대비된다는 게 그중 하나다. 우리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색을 짚어낼 수 있다. 들장미 열매, 마지막 남겨진 옻나무 열매, 층층나무의 불타는 듯한 빨강색과 주황색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시선을 끌기에는 전반적으로 색이 적어서, 우리는 또한 식물의 유용한 특질인 질감과 형태에 주목하게 된다. 나무껍질, 참나무혹, 견과류 껍질, 둥글게 감긴 머루넝쿨 등 이 모두가 고요한 풍경 속에 도드라진다. 만약 휴지기의 식물 줄기를 구분할 줄 안다면, 겨울은 봄싹이 돋아날 곳을 찾아내는 기회의 시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집자들에게 겨울은 식물 재료 대신 산업 재료, 특히 연중 다른 시기엔 잡초로 뒤덮여 있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재료들을 채집하는 때이다. ---「겨울 채집」 중에서
잉크 만들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비법이 필요 없다. 안료만 넉넉하다면 그 무어든 식초, 소금과 함께 낡은 냄비 안에 퐁당 떨어뜨리면 그만이다. 그걸 한두 시간 끓이고, 아라비아고무액 한두 방울을 첨가한다. 자, 이렇게 해서 잉크가 완성되었다. 종이 위에서 잘 변하지 않는, 색을 발하는 액체가 바로 잉크니까. 이 책에 실린 방법대로 하면 2컵(480ml) 혹은 2온스(60ml)짜리 병 8개 분량의 잉크를 만들 수 있다. ---「수제잉크: 기본 레시피」 중에서
카본블랙(carbon black)은 가장 오래된 잉크로 점토, 종이, 파피루스, 뼈, 동물의 가죽 위에다 최초의 글자들을 새기는 데 쓰였다. 카본블랙 잉크는 뼈, 포도넝쿨, 소나무, 올리브유, 상아, 조개껍질, 복숭아씨 등으로 만들 수 있다. 사실상 모든 건조 재료, 한때 살아 숨 쉬던 것을 말린 것이면 뭐든지 다 가능하다. 여기에 불씨만 더하면 된다. 나는 검정색 잉크를 만드는 내내 어린애 같은 설렘을 느낀다. 재료를 재로 태우면서, 불의 환락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그다음에는 검댕을 물과 결합시킨다. 그러고 나서 그 물로 종이를 가로지르며 글자를 자아낸다. 만약 재가 제대로 섞이지 않으면, 아름다우나 묘하게 희뿌연 색이 나타날 것이다. ---「색 & 레시피, 검정Black」 중에서
샙그린 제조법은 변형 가능하며, 그러는 동안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보라색 갈매나무 즙에 가성소다액 한 방울을 추가하면 즉시 보라색에서 파랑색으로 바뀐다. 여기에 또 다시 가성소다액을 떨어뜨리면 청록색이 되었다가 밝은 녹색이 된다. 여기에 가성소다액을 아주 많이 첨가하면 골든옐로우로 바뀌고, 그대로 두면 마침내 종이를 태워 구멍을 낸다. 가벼운 부식을 일으키는 가성소다가 갈매나무즙의 산성도를 높여서 이런 색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변화를 지켜보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 비록 잊고 지냈지만, 이 강인한 관목이 내게 가르쳐준 사실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색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지 바래거나 어두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 색의 전 영역을 오가며 살아간다는 것, 바로 이 사실 말이다.
---「색 & 레시피, 녹색Green」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