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이후로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안 살아본 것은 아니다. 이런 곳은 살 때는 더없이 편하나 떠나고 보면 딱히 남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런데 고작 2년 반을 살았던 보광동의 단독주택은 머릿속에 카테고리를 만들어 정리해야 할 정도로 수많은 기억들을 남겨주었다. 아마 나는 누군가가 잘 만든 세련되고 편리한 공간보다 뭔가 좀 불편하고 어설프더라도 무엇이든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나가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보광동에서 살면서 집이라는 곳이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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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1일 이른 아침, 나는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고 눈을 떠보니 제주도 여행 중인 동생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언니 우리 집 사. ㅋㅋㅋ” 여기서 ‘우리 집’은 나와 동생이 살 집을, ‘ㅋㅋㅋ’은 황당함을 의미한다. 우리 둘이 살 집이 둘 다 여행 간 동안 엄마에 의해 독단적으로 계약되었다는 뜻이다. 위치는 서울, 지하 1층+지상 2층의 단독주택, 1984년 완공, 급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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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단독주택을 샀어요?” (속마음 ‘아파트 샀으면 엄청 올랐을 텐데’) 단독주택을 산 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왔지만, 우리의 대답은 단순하다. 단독주택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었고, 그만큼 단독주택이 자연스럽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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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은 시도 때도 없이 문제가 생긴다. 할 줄 모른다고 매번 전문가를 부를 수는 없다. 결국 직접 해보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사소한 문제 앞에 마음의 담대함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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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2층 중에서 우리는 프라이버시와 옥상 사용을 위해 2층에 살기로 했다. 그렇게 남은 1층과 지하의 공간 활용 방법을 두고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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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무수히 많은 ‘참을 인’을 새겨가며 번 돈은 (당시 남자친구도 없었음에도) 결혼자금 명목으로 은행으로 다시 흘러 들어갔고, 20년 만기 연금보험에 매달 적지 않은 돈이 빠져나갔다. 철저히 미래만을 위한 삶이었다. 현재가 미래를 위해 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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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혼관을, 《동물농장》과 《달과 6펜스》는 직장관을, 《월든》은 내 경제관에 미세하게 가 있던 균열을 도끼로 찍듯 파고들었고 나는 거기에 완전히 항복했다. 결국 독서모임을 다니고 1년쯤 지났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고, 비혼주의를 선언했으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조금 벌고 조금 쓰는’ 소박한 삶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 p.91~92
‘메이크업 너무 마음에 들어요, 또 올게요’라는 후기를 처음 받은 날에는 그 화면을 캡처해서 하루에 몇 번이고 읽기도 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단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도 진상을 알아보는 육감도 키워지고 있었다.
--- p.102~103
이 집에는 요일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셋이 있다. 월요병과 불금의 개념이 없고, 주말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나의 출근을 통해 오늘이 주중이라는 것을 가름하고, 행여나 휴가라도 쓰는 날에는 주말인지 혼동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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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해장하고 동네 산책을 하며, 체크아웃 시간이 없는 숙소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언니와 나는 누가 오더라도 손님맞이를 한답시고 오버하지 않고 기존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태연함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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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은 날이면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다 1층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밥을 먹다가 2층에서 술을 꺼냈다. 그렇게 마당과 1층, 2층, 옥탑을 오가며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집 밖은 조용했지만 안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거렸다. 모든 일에 나쁜 면만 있지 않다는 말처럼 코로나로 인한 위기 상황은 같이 살게 된 우리가 좀 더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 p.133~134
옥탑방 그림 모임은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되었다. 나의 마지막 그림은 중학교 미술 수업 시간에 포스터컬러로 그린 불 조심 선전 포스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그림을 그릴 기회도, 딱히 이유도 없었다. 즉흥적으로 그림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그림을 그렸고, 난생처음 유화도 그려보게 되었다. 붓을 잡았더니 갑자기 내 속에 잠들어 있던 미술적 재능이 발현되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림 그리기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 p.142
여기까지가 아주 열악한 장소에서, 사업적 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플리마켓을 열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이다. 과연 다음 플리마켓은 열리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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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과 2층의 입주민들이 모여 만든 단체방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지하 총각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어서 같이 모이기가 힘들다). 바로 ‘카탄Cat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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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면서 얻게 된 기쁨 중 단연 최고는 ‘나눠 먹는 기쁨’이다. 여기에는 ‘얻어먹는 기쁨’이라는 덤까지 함께 온다.
--- p.171
단독주택이라고 하면 으레 연상되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정원을 품고 있는 마당이 있다. 바비큐 그릴에는 꼬치가 올려져 있고, 커다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느슨하게 둘러앉아 웃고 떠드는 그런 마당 말이다. 단독주택 살이 6년 차, 우리 마당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다.
--- p.174
대방동으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마음은 가깝지만 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은 늘 아쉽고, 몸은 가깝지만 마음은 전혀 가깝지 않은 이웃들은 우리를 외롭게 한다. 이렇게 몸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마저 나눌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p.206~207
곶감 만들기는 단순했지만 품이 많이 들었다. 먼저 감을 깨끗하게 씻은 후 일일이 칼로 껍질을 깎아야 했다. 고구마 껍질도 까기 귀찮아서 그냥 먹는 나인데, 반쯤 물컹해진 감을 억지로 붙잡아 껍질을 깎으려고 하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껍질을 깎은 감은 소독을 위해 끓는 물에 한 번 데쳐야 하는데, 이 소독 과정을 건너뛰면 수일 내 곰팡이가 펴서 모조리 폐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동생이 미리 사놓은 곶감 전용 걸이에 하나씩 걸어 공기가 잘 통하는 베란다에 매달아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 p.213
결과는 (1년 차 대비) 대풍년! 방울토마토는 주렁주렁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열렸고, 바질은 너무 크게 자라 이러다 나무가 될 것만 같았다. 애플민트는 매일 모히토를 만들어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 p.217
에너지 발산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아주 쉽게 김장을 결정하게 된다. 김장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 p.228
2020년 여름, 축사가 침수되어 그 안에 있던 소들이 수영해서 축사 옥상으로 대피했다는 뉴스가 나오던, 정말 말도 안 되는 폭우가 쏟아졌던 밤이었다. 우리는 2층 통창으로 퍼붓는 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지하에서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그때 지하 총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고양이가 죽을 것 같아.”
--- p.234
라이는 장족의 발전을 넘어 이제는 아예 우리의 껌딱지가 되었다. 낮에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으면 놀아 달라고 키보드 위에 대자로 드러눕고, 그래도 놀아주지 않으면 실망한 얼굴로 무릎에 누워 잠을 잔다. 밤이 되면 나와 동생 방을 번갈아 가며 우리 몸에 등을 맞대고 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세상 편하게 배를 내놓은 채로 같은 베개에서 자고 있는 라이의 모습이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 p.245
손가락 깨물고 혈서만 안 썼을 뿐 그에 준하는 결연한 각오로 ‘같이 잘살아 보자’를 외치며 웅장한 마음으로 함께 살기를 시작하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p.253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꼬를 튼 인사였지만, 동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얼굴도 익히고, 가볍게 안부도 묻고(대부분 ‘엄마는 요즘 안 오시냐’는 물음이다), 동네의 각종 핫한 정보들도 듣게 되면서 우리에게도 이웃이 생겼다.
--- p.264~265
이제 이 집은 혼자 있는 게 더 어색하다. 가끔 2층 거실에 앉아 있을 때면 1층 마당에서 하는 독서모임 소리가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그럴 때면 창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사람을 귀찮다고 여겼던 내가 이제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있다.
--- p.282
그렇게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선을 침범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세련된 거리 둠과 깔끔한 예의 차림으로 서로의 흠 따위는 1도 나누지 않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무너지고, 비참하고, 질척이는 관계를 해보기로 다짐했다.
--- p.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