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일은 개를 목욕시키는 일, 운동장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일, 심심함에 못 견뎌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일들과는 다르다. 그렇건만 시는 무위에 헌신하는 일, 아무 쓸모가 없는 아름다움을 구하는 일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덧없고 하염없는 일이 “진리를 환히 밝히는 기투의 한 방식”이라고 단언한다. 시는 자아 바깥으로 송출하는 말의 한 방식, 즉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너가는 말이라는 점에서 세계와 대지를 비은폐 차원으로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언어로 빚는 시는 그런 맥락에서 “언어 속에서 스스로 생기”한다. 시를 쓰는 이들은 자신과 제 경험을 탈취하여 언어 속으로 밀어넣는다.
--- p.6
시는 여러 지층들을 품는다. 존재 사건의 지층, 차이와 반복의 지층, 역사의 시간과 경험의 지층, 신체와 관능의 지층, 무의식의 지층… 지층은 과거의 것들,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간, 하강과 퇴적의 산물이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
--- p.11
병이 깊어진 당신 앞에서 당신의 회복과 회생을 기다리는 희망이란 한낱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희망보다 절망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다. 힘을 다 빼고, 즉 포기와 체념을 하고, “그냥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으면” 되니까. 희망을 견디는 일은 슬프고 힘들다. 희망이란 “피가 철철 흐르도록 아직,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이니까. 절망은 불운에 주저앉고 탈진해 버리면 그만이다. 반면에 희망은 여전히 피를 흘리며 살고, 더 뜨겁게 사랑하라는 절체절명의 명령이다. 병이 깊어진 당신,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탈진과 고갈에 이른 내게 희망은 그것들을 견디고 살아남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희망은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을 가져온다.
--- p.24
밥 먹는 풍경과 밥을 버는 풍경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시의 화자는 “이놈의 가게를 팔아버리라고” 소리친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아들의 저항에 엄마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으로 대응한다. ‘나’는 비루한 삶은 삶이 아니라고 저항하지만 ‘엄마’는 ‘나’의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엄마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그저 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잠자코 밥을 먹는 행위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밥이 입에 들어가는 일은 생명을 부양하는 행위일 테다. 그것은 인류 종족이 수천 년 동안 지구에 살아남은 거룩한 방식이다. “밥 먹는 풍경”이 거룩한 것은 밥을 어떻게 구하고 먹느냐 하는 일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그 인격과 내면의 가치를 낱낱으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 p.40
시인은 상상한다, 불과 거품들, 물방울과 뱀, 바다와 소금, 행성과 별자리들, 흙의 향기, 과일의 진실을. 또 단맛과 쾌락을 상상하고, 그보다 더 많은 불가능과 전생과 영원 따위를 상상한다. 시인은 온갖 식물에 이름을 붙여 호명하며, “여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한다. 야만의 도시에 살든, 기후 위기 시대에 살든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가 잠긴 물속 수도원을 상상한다. 내일이라는 추상을 처음 인지한 이도 시인이었을 테다.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다. 시인은 커다란 나무와 그 나뭇가지 위에서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오르는 상상을 펼친다. 상상은 움직임이 없는 것들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시인은 상상으로 불의 상승하는 기운과 비상한 활력을 전유하는 새들의 세상을 불러온다. 시인이란 소멸하고 굳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고, 볼품없는 것들에 노래와 향기를 심는 존재일 테다.
--- p.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