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입구 담벼락에 엉켜 있는 수세미 넝쿨을 보며 나영은 꿈속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나무나 풀이나 꽃처럼 말을 할 줄 모르는 것들과 말하기를 좋아하던 덕중이었다. 그래서 덕중은 어려서부터 식물들이 어떤 효력을 지녔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듯하다. ... 집안사람들은 덕중이 키운 식물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덕중이 키운 야채와 과일을 먹기 위해 날짜를 세며 기다리곤 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덕중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프롤로그」중에서
그들은 그제야 임영대군과 귀성군이 아침부터 입궐한 것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했다. 궐 안의 여인이 궐 밖 귀성군에게 연서를 보냈다는 이야기에 임금도 금방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얼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궐 안의 여인이라면, 그것이 누구란 말이냐? 정확하게 이름을 말해 보거라.”
“덕, 덕…… 덕중입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임영대군은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정리했다. ... 귀성군! 준아! 이 애비가 혼란스러운 단 한 가지는 정말 그 편지가 연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준은 왜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고 왕 앞에서 갑자기 연서라고 말한 것일까.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소용 박씨의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상전하, 알고 계시는지요? 주상전하께서 형제의 가족을 처형하실 때마다 그 응보처럼 전하의 가족이 죽어 나갔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소첩을 죽이시면 응보처럼 또 다른 한 사람이 죽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소첩이 전하의 가족이면 형제의 측근이 죽어 나갈 것이고, 소첩이 형제의 가족이면 전하의 측근이 죽어 나갈 것입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백팔장!” 덕중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저절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감추고자 깊이 닫아두었으나, 비밀 스스로 발효하고 팽창하여 뚜껑을 열고 나온 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 뱉어내고 나니, 마치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느낌이었다.
---「1부. 십 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중에서
훈민정음 세종어지에 명백히 ‘스물 여덟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최만리 상소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고, 단지 현왕께서 훈민정음 자음을 줄이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니, 학문적인 관점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라고 했다. 문제가 되는 자음은 ㆆ와 ㅎ인 모양인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 두 발음이 혼동되기도 하고 같이 발음되기도 했다. 백성들이 사용하기 더 편해지려면 어떤 자음을 줄여야 할지,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2부 그림이 그림이 아닐 때」중에서
“네년이 가지고 온 뽕잎의 바늘구멍에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뽕나무를 상목이라고 하지 않더냐. 뽕나무 상(桑) 자를 쓰는데, 약자로 쓰면 나무 목(木)과 세 개의 열십(十) 자로 나타낸다. 즉 木과 세 개의 十를 합치면(十十十十八) 마흔여덟이 된다. 그래서 마흔여덟 된 자를 상년(桑年)이라고 한다. 아래 뽕나무 잎사귀 바늘구멍은 木에 十이 아홉 개 합쳐졌으니 얼마가 되느냐. 바로 백팔이 되지 않느냐.”
---「2부. 그림이 그림이 아닐 때」중에서
두 사람은 해가 져서 점점 그림의 색깔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안견이 떠나는 뒷모습을 신숙주는 길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이나 그림을 대하는 안견의 마음 수준이 같은 것을 보고, 여태 그를 화공으로 얕잡아보았던 자신의 옹졸함이 느껴져서였다.
---「3부 밀약서의 비밀」중에서
『월인석보』는 운문으로 된 『월인천강지곡』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에 일치하는 산문으로 된 『석보상절』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단락마다 내용상으로 연관이 있어, 아무데서나 자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1권은 108면에서 뚝 끊고 막아버려서, 2권의 첫 장에서 끝맺지 못한 『석보상절』로 시작되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나머지 권들의 첫 장은 모두 『월인천강지곡』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방비리의 말을 들으며, 김상선의 눈빛이 반짝였다. “상선 어른, ‘摠一百八張’이라는 표기 속에서, ‘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4부 연애편지는 없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