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라는 말 뒤에 숨은 잔혹한/ 현실
- 모든 사람은 존엄하게 살 권리와 먹을 권리가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 10년 내에 남녀노소 어느 누구도 주린 배를 안고 잠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1974년 제1차 세계 식량 정상 회의]
- 세계 영양 결핍 인구를 2015년 이전에 (현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겠다.
[1996년 제2차 세계 식량 정상 회의]
- 지금부터 2015년까지 하루 소득이 1달러 미만인 세계 인구 비율과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율을 (현 수준의) 절반으로 줄일 것을 결의한다.
[2000년 국제연합 밀레니엄 정상 회의]
- 개발도상국의 기아 인구는 1990~1992년간 산출된 기아 인구에 비해 300만 명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통계 오차로 봐도 될 만큼 너무나 적은 숫자다.
[2006년 세계식량농업기구]
단순히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기아 문제의 해결책이라면 얼마나 간단하고 좋을까. 과거에 기아는 ‘후진성’의 동의어였다. 그렇다면 190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고 커진 세계 산업 규모와 자본, 시장의 규모를 볼 때 기아는 후진성과 함께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매번 저렇게 똑같은 약속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1900년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대표적인 기아 사건과 그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로 1932년 소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스탈린이 토지국유화를 실행하며 발생한 ‘식량적 대학살’이 있었고, 1966년 중국의 마오쩌둥이 문화혁명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시키며 소련과 유사한 이유로 수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희생되었다. 둘째로 1967~1970년까지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주가 분리?독립하며 발생한 비아프라 내전은 100만이 넘는 사람들을 기아로 내몰았다. 셋째로 1980년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정권이 중앙 권력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강제 이주를 정당화하고 국제 원조를 받기 위해 국민들의 영향 결핍을 이용했다. 이상 세 가지 경우만 보더라도 기아는 더 이상 산업화의 문제가 아닌 것이 명백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새로운 기아’
세계 인구 절반의 굶주림은 선진국들의 소비와 비교하면 물 한 방울 값에 불과하다.
정치적 기아, 기후적 기아, 경제적 기아, 부인된 기아, 전시된 기아, 도구화된 기아 등
‘포트모더니즘적인 새로운 기아’의 모든 목록이 여기 준비되어 있다.
세계 산업 규모는 더욱 발전하고 세상은 풍요로워졌는데도, 기아 인구의 비율은 더 높아지고 있다. 많은 국제적인 정부/비정구기구와 사회운동단체들이 일단 굶주림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1차적인 식량 원조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인의 인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기아’는 그 원인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의 원인을 꼽는다. 첫째는 직접?개인적 원인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후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 보건과 공중의 문제나 의료 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로, 질병과 전염병에 의해 기아 인구가 생기는 경우다.
둘째는 잠재적·사회적 원인으로 이 항목은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정치적 혹은 보건 보급과 같은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사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의 관계(남녀노소)나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고유 문화에 의한 계층 관계는 권력 관계에서 약자인 사람들을 기아의 최전선으로 내몬다.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여성, 어린아이, 농민들로, 그들은 영양실조로 인한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도 위협받는다.
셋째, 총체적 원인은 국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화두는 ‘세계가 전 세계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에서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로 확대된다. 내전이나 국가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기아, 국가 체제의 전환으로(공산주의 체제로의 전환) 토지국유화 등의 정책적 변화에 의해 기아가 발생하는 경우는 국제적인 원조만으로 그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할 수 없다. 중앙정권이 국제 원조 물품을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가 선언되면서 시장의 원칙이 적용되어, 국가간 자유무역의 확산에 의해 발생하는 기아 상황이 있다. 이 경우도 국제 원조 물품은 오히려 곡물 상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정작 원조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새로운 기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차원적인, 즉 개인적인 위생 보건 교육에서부터 문화적 편견의 타파, 국제기구의 개입 등, 모든 차원에서 동시에 떵움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 2000년 밀레니엄 정상회의가 약속한 2015년이라는 기한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약속이 선언된 후, 절반쯤 되는 지점에 우리는 와 있다. 지금 세계는‘기아 문제’라는 숙제를 얼마나 잘 풀어가고 있는지, 중간 보고서를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기아 문제에 있어서는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행동의 시작이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기아는 최대의 불명예라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힌 ‘새로운 기아’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알고, ‘즉각’ 행동하는 것이다.
장 지글러Jean Ziegler의 말처럼“기아 문제에 있어서는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행동의 시작”인 것이다. 무턱대고 하는 원조가 아니라 기아 문제가 심각한 개발도상국이나 최빈개도국의 국가 혹은 사회 내부의 질적 발전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교육 확산,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역량, 즉 자국 내 사회단체들과 국제단체와의 연대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원조의 실현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있고, 또 그 모든 일들을 해낼 역량이 우리에게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기아 문제를 그냥 둔다면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