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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5
시와 사유 · 하나 9 제1부 말귀 말귀 13 / 빠스각 빠스스각 14 / 월광 소나타 16 / 하몽하몽 17 / 환상곡 18 / 미완성 20 시와 사유 · 두울 23 제2부 달맞이꽃 달맞이꽃 27 / 칸나 28 / 바람과 바람 사이 그녀가 서 있었네 30 / 흰 몸 31 / 환幻 32 / 입술과 달 34 시와 사유 · 셋 37 제3부 앰뷸런스 꽃샘 은유 41 / 앰뷸런스 42 / 이 시인 놈아 44 / 월검月劍 46 / 화전花煎 47 /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불안 48 시와 사유 · 넷 51 제4부 시검詩劍 누설 55 / 시검詩劍 56 / 독참獨參 58 / 덩굴장미 59 / 하霞 60 / 모란 62 시와 사유 · 다섯 65 제5부 황진이 초희 69 / 황진이 70 / 귀면鬼面 72 / 천년 바람 73 / 아내에게 74 /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76 자전 해설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79 |
꽃 속엔 거울이 보고 있었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네 어둠이 내리면 사라져 버릴 이상한 일이었네 잃어버린 사랑이 와 있었네 목걸이와 루주와 반지는 바람의 손톱에서 자랐네 그 겨울 흰 눈의 이야기들이 빠스각 빠스스각 쏟아져 나왔네 그녀는 붉은 목소리로 말했네 폭설 속 메아리가 묻히기 전까지, 가슴속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네 꽃 속엔 거울이 누워 있었네 --- 「빠스각 빠스스각」 중에서 그 밤 열쇠를 들고 급히 차를 몰고 나갔는데,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막막했는데…, 너무 붉어 보이지 않았는데, 캄캄한 길 밖에서 혼자 서 있었는데……, 그때 왜 눈물이 흐억 흐억 흐억 솟구쳐 올랐는지 몰라 해가 넘어갔는데, 어디에서 분명 잃어버렸는데, 명치끝이 너무 아파 한밤중 짐승처럼 발버둥 쳤는데……, 흰 눈과 흰 눈 사이에 그녀가 서 있었는데, 몸이 없어도 꼭 온다고 했는데…, 철컥, 철컥, 철컥, 겨울은 또 어쩌자고, 빈 차고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지 몰라 --- 「달맞이꽃」 중에서 오늘 하루가 이 지상에서 그냥 흘러가도 되는 줄 알았다 너를 만나기 전엔, 오늘 하루가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날인 줄 알았다 너를 만나기 전엔, 저 길거리에 봄이 그냥 오는 줄 알았다 그냥, 매화가 피고 그냥, 목련 꽃잎이 떨어지고 아까운 목숨들이 간밤에 사라져 가도, 음압 병실에 실려 가는 그 다급한 앰뷸런스 소리를 듣기 전, 오늘 하루는 마음대로 쓰다 버리는 몸인 줄 알았다 한 번도 절실하게 별을 쳐다보지 못한 눈빛 너를 만난 후, 39.5℃의 열에 들떠 어둠 속 허우적거려야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앰뷸런스」 중에서 |
김동원 시인에게 시는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이다.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치지 못하는 것(不及)이 시다. 언어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 것이 시감(詩感)이다. 하여, 시가 무(巫)에 접하면 신(神)이 보인다. 명시는 보이지 않기에 들리고 들리지 않기에 보인다. 신품은 행간 사이에 귀신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대저, 천지 창조의 시법(詩法)은 무량하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 시법은 한곳으로 귀착되나 그에 이르는 길은 천만 갈래이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세계, 그것이 시다.”라고 한다. 시 30편과 함께 그의 시세계로 들어가 본다.
“왜, 나는 시에 혹하는가. 천지 만물이 나와 불이(不二)한 까닭이다. 병(病)은 생사의 면벽 수행이다. 하여, 이승과 저승 사이 낀 풍경은 ‘환(幻)’이다. 어릴 때 나는 집 앞 바다가 우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달빛에 스민 혼령인 듯, 그 천 길 물속에서 우는 곡소리는 슬펐다. 생에서 죽음이 싹트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 죽음에서 생이 열리는 영감을 느꼈다. 내 시는 병의 문을 열고 바라본 앞마당 가득 핀 꽃의 이야기요, 피의 이야기다. 수만 생을 윤회한 나의 또 다른 환생의 조각보다. 하여, 나는 늘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렸고 외로워 흔들렸다. 놓쳐 버린 물의 무늬로 흔들렸고, 불 속 그림자로 흔들렸다. 밑도 끝도 없는 기미와 기척에 흔들렸고, 불안한 목소리에 흔들렸다. 밤낮없이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와 모호성, 풍자와 해학의 행간에 바장였다. 시의 급소, 그 사랑과 이별의 통증은 신명과 지극으로 풀었다. 소리를 좇다 숲을 잃었고 언어를 좇다 시를 들었다. “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도덕경 1장) 사이를 헤맸다. 어둠에 손을 넣어 달을 만졌고, 바다에 머리를 넣어 해를 먹었다. 공을 뚫다 색을 얻었고, 색을 품다 공을 보았다. 하여, 시는 “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약부장천하어천하, 若夫藏天下於天下)”(장자)임을 알겠다. 하늘은 감추고 시인은 들춘다. 간절히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향해 가장 아파하는 자만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얻는다.” ―「자전 해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