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는 클로버와 귀리가 무성한 들판 한가운데 하얀 나무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지붕이 뾰족한 네모난 집들엔 해가 지면 닫는 파란색 덧문이 나 있다. 가끔 새들이 굴뚝으로 빠져 그을음이 잔뜩 묻은 날개를 격렬하게 흔들며 집 안을 날아다녔다. 사람들은 새를 쫓아내는 대신 집에서 키우면서 새들의 노래를 배웠다. (중략) 날씨가 추워지면 에밀리는 하얀 눈으로 뒤덮이고 지혜로운 박새들이 가느다란 발로 새하얀 시를 쓴다.
--- p.10
해변의 집에 있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에밀리를 만나러 갔다. 책에서 본 사진들과 묘사를 바탕으로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홈스테드였다. 나는 종이 마루에 구멍이 날까 봐 까치발로 들어갔다. 하지만 감히 앉을 생각은 못 하고 문을 열어놓은 채 다시 나왔다.
--- p.80
에밀리 디킨슨 사후 백 년이 되는 해에 몬트리올 출신의 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시는 삶의 증거지 삶 자체는 아니다. 시는 활활 타고 남은 것의 재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그것을 혼동해서 불 대신 재를 창조하려고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의 기호나 징후를 발견하고 그것 자체보다는 기호를 재창조하려고 한다. 껍데기를 좇다가 알맹이를 놓치고 만다. 우리는 성공의 기호를 좇지만, 무엇이 성공의 기호인가?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 절대 재를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가 창조한 것은 불이었을까? 그랬을지 모른다. 에밀리가 지나친 길 위로 불길이 활활 타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는 꽃에 물을 주느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 p.125
“무엇보다도 당신의 글을 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산문이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에밀리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간단하죠. 각운이 없잖습니까!”
바로 그거였다. 리옹 선생님의 각운 수업이 떠올랐다. 완전운, 완전 동일운, AABB 형식. cat고양이, hat모자. fish생선, dish그릇. love사랑, dove비둘기. 바보 같은 짓거리.
에밀리는 ‘완전한’ 것이나 ‘동일한’ 것, 그 밖의 어떤 각운에도 관심이 없었다. 에밀리가 아는 것은 불완전하거나 틀린 것밖에 없다. 시는 그래야 한다. 에밀리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이 일련의 행동에도 각운은 없다. 웃음이 나왔다.
--- pp.153~154
에밀리는 열다섯 살 때 그랬던 것처럼 꽃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에밀리는 백지로 만든 정원에 산다. 나비를 꽂듯 종이 위에 글자를 꽂고 새처럼 펜으로 종이를 쪼았다. 그의 시는 절반 이상이 박새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절반은 과꽃이고, 불타는 석양의 가슴팍이자, 거대한 영원의 주머니이며, 침대 가까이에서 꿈꾸고 있는 수많은 성경 구름이다.
나는 가능성 안에 산다 ─
산문보다 더 좋은 집이다 ─
창문도 많고 ─
문도 ─ 훨씬 좋다 ─
--- pp.196~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