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는 각종 전쟁 이야기다. 암, 부도, 이혼, 입시 취헙, 수많은 죄와 중독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여호수아로, 갈렙으로, 기생 라합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탐심으로 공동체를 망하게 한 아간, 여호수아를 속여 화친을 맺은 기브온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전쟁이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전쟁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 될 때 암에 걸려 낫지 못하고 죽어도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된다. 사업이 망해도, 입시에 실패해도 우리는 승리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전쟁 이야기이자 동시에 ‘살아남’의 이야기이다. 남편이 급성 간암으로 하루아침에 떠났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갔기에 생명의 사건이 된다. 혜옥 자매가 직장암으로 아프다가 갔어도 날마다 자기 죄를 보고 큐티한 것을 나누며 다른 많은 사람들을 살아나게 했기에 승리의 사건이 된다. 결국 우리의 전쟁은 내가 살아나고, 남을 살아나게 하는 약(藥) 재료이자 축복의 통로인 것이다.
--- 서문 중에서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수 2:6)
라합이 정탐꾼들을 어디에 숨겼습니까?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 속에 숨겼습니다. 숨겨지기는 했지만, 안방에 편안하게 숨겨진 것이 아닙니다. 지붕 위 삼대 속에 숨겨졌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고, 큐티 한다고, 교회 나온다고 갑자기 편안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삼대는 세마포를 짜는 재료인데 실로 만들어지기 전에, 삼의 줄기 상태를 말합니다. 지붕 위에 그 삼대를 벌여 놓았던 것입니다. 누가 나를 막 쫓아와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지붕에 딱 올라갔더니, 지붕 위이기는 해도 햇빛이 있고, 바람도 잘 통하는 곳입니다. 숨이 쉬어지는 곳입니다. 이처럼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면, 죽을 것 같아도 그곳이 숨이 쉬어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이 있는 곳이 숨이 쉬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어도 그놈의 안방 타령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어련이 알아서 햇빛 비치고 바람 통하는 지붕이 좋은 곳으로 피할 곳을 주셨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안방에서 못산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햇빛이 통하는 곳이 지붕이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삼대 속에서는 세마포를 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마포 입고 돌아가셨잖아요,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지요. 그 세마포를 짤 수 있는 삼대 속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데 감사한 줄을 모르는 겁니다.
나일강이 있으니까 비가 와도 감사한 줄 몰라요. 메마른 광야에 있으면 비가 한 방울만 떨어져도 숨이 쉬어지고 너무 감사할 텐데 말이지요. 찬양이라는 것이 소프라노 소리를 잘 낸다고 해서 되는 것입니까? 찬양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 체험으로 할 때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찬양은 기술이 아니라 감사로 하는 것이지요. 보스턴 오페라 가수였던 형제가 와서 왜 이렇게 낮은 우리 교회 찬양대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겠다고 하는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면 이렇게 보내 주십니다. 우리가 비 한 방울에 감사하면, 주님이 다 알아서 보내 주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나일강에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 하는 겁니다. 감사가 없다면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안방만 바라지 말고,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으로 나를 숨 쉬게 해 주시는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숨이 쉬어지는 환경입니다. 다른 것 다 떠나서, 말씀이 있고 지체가 있다는 것이 숨이 쉬어지는 환경입니다.
=적용= 피할 곳을 내시는 주님의 말씀, 영적 지도자의 판단에 즉각 순종합니까? 말씀의 지붕 위가 불편하고 창피해서 내 편한 대로 안방타령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