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편리하고 분명 매력적인 것이기에 사람들이 가지기를 원했을 테지만, 실제로 그 물건을 구입한 동기는 ‘남이 가지려 하니까 나도 가지고 싶다’라는 논리였다. 진정 그것들을 원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옆집도 요전에 컬러텔레비전을 샀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제는 사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것을 사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다’라는 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 p.24
우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남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자동적으로 생각해버리는 욕구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편리한 사회였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서는 ‘자신의 머리’나 ‘자신의 감성’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노선에 따라 살아가면 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자신에게 인생의 의미나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의 ‘살아가는 의미’ 따위를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는 의미’를 탐구하는 힘을 상실해갔다. --- p.26
거품경제 시대에 왜 우리는 그런 말도 안 될 만큼 비싼 돈을 주고 땅을 사고, 주식을 샀을까? 거품이 꺼지고 보니 우리는 그때가 일종의 광기에 휩싸인 시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사회 욕구의 총결산이었다. 우리가 땅을 사고 주식을 산 것은 다른 사람들이 땅을 원하고 주식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도 직업이나 대학을 선택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이 적용되었다. 내가 어떤 땅이나 아파트를 구입한 것은 내가 그 땅을 가지고 싶고 아파트를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그 땅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해도, 그 집이나 아파트가 내 취향에 맞는다 해도 그 물건들을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멀리했다. --- p.27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으려 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남이 욕구하는 것’을 사려고 했다. ‘원하는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팔리는 것’을 사려고 한 것이다. --- p.28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좀 가르쳐주세요.”
“그건 좀 그러네.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사람들은 보통 무엇을 하고 싶어 할까요?”
“보통이라고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다르지 않을까. 딱히 표준 같은 게 있지도 않으니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서 살아온 아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질까를 먼저 생각해왔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이들. 이렇게 ‘투명한 존재’는 결국 자신의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 p.39
평생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회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너 같은 인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딱히 네가 아니라도 돼”라는 말을 듣는다. 그제야 우리는 지금까지 회사에게도 동료에게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믿었던 자신이 어디까지나 교환 가능한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 p.46
인간으로 살아온 역사나 얼굴이 지워지고 이름 없는 인간으로 해고된다. 그것은 그야말로 ‘투명한 존재’ 그 자체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해고된 사람들 가운데 자살자가 증가하는 현상은 경제적 이익을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인격도 없는 ‘인간 자원’으로 취급당하고 인간임을 부정당한 데 대한 억울함 때문이 아닐까. --- p.96
공원에서 매일 아침 진지한 자세로 건강체조를 하는 할아버지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건강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대답하더라는 현대인의 ‘건강 신앙’을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 우스갯소리를 그대로 경제성장이라는 신앙에 적용해도 될 것 같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굶어 죽어도 좋다는, 참으로 웃을 수도 없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미 과로사 문제 등으로 그 모순들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 p.116
우리는 인생의 ‘내용’ 속에서 풍요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성장률’이라는 숫자 쪽에서 확실한 무엇을 느낀다. 경제성장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풍요를 우리 생활의 내면에서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얼마나 풍족한 생활을 하는지, 자신이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생활 속에서 느끼지 못하고, 월급이 이 정도 올랐으니 풍족해졌으리라고 그 액수로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p.119
“어디 근무하세요”, “○○기업입니다”, “아, 정말 좋은 회사에 다니시네요”, “어느 학교에 다녀”, “○○고등학교입니다”, “으응”.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회사 이름을 들어본들 그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그 회사에서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 지금 어떤 고민이 있는지, 개인 고유의 살아가는 의미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과 소통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회사 이름을 듣기만 하고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소통 방식이 만연하고 있다. --- p.143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가 “새로운 발견으로 매일 가슴 두근거리면서 살아갑니다”라고 말하면 모든 사람이 감탄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매일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갑니다”라고 말하면 “당신 아직 고생이란 것을 몰라서 그래”, “정말 천하태평이로구만” 하고 핀잔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반응은 우리 모두에게 ‘남에게 뒤쳐지기 싫다’라는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매일 울적한 기분으로 재미도 없이 살아가는데, 너만 가슴 두근거리면서 산다는 건 말이 안 돼’라는 질투심이 타인의 두근거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타인의 두근거림에 자극받아 ‘그럼 나도 설렐 만한 것을 찾아봐야지’라는 식으로 전개되면 좋겠지만, 우리는 때로 남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 p.168
지금까지 일본인의 생활은 비효율적인 시간을 철저하게 줄여나가는 ‘생활의 경제화’를 지향했다. 24시간 가운데 ‘돈을 버는 시간’과 ‘돈을 쓰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돈을 벌지 않거나 쓰지도 않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라 여기고, 늘 “바빠, 바빠” 하면서 일하고 놀았다. 당연히 노는 데는 돈이 든다. 그리고 그 돈을 만들기 위해 또 일한다. 일해서 GDP를 늘리고, 놀고 소비하여 GDP를 늘린다. 그렇게 생활 전체가, 그리고 살아가는 기쁨이 ‘돈’에 지배당하고 경제로 단일화된 곳에 불황이 덮치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살아가는 의미’는 한순간에 빈곤해지고 만다. 돈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돈이 지배하는 생활에서 돈이 없어지면 우리 생활은 한순간도 버티지 못한다. --- p.199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는다. 자존심이란 자기 신뢰라는 말과도 같다. 자신이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 존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 자기를 신뢰하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설령 했다 하더라도 반성하고 후회한다. 그러나 자존심이 낮고 ‘나 같은 건 별것도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무슨 일이든 해버린다. 스스로 ‘내 멋대로’인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식으로’가 ‘내 멋대로’로 바뀌느냐 바뀌지 않느냐는 자존심이나 자기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자기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내 식으로’는 자신을 살리고 타자도 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기 신뢰가 없는 ‘내 식으로’는 ‘내 멋대로’가 되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내 멋대로’가 횡행하는 사회는 우리 하나하나의 자기 신뢰, 자존심이 낮은 사회의 반증이라고 할 것이다.
---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