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만으로 차별ㆍ혐오를 근절할 수 있는가
손민규 (lugali@yes24.com)
2018-02-08
한국 현대사에 관한 강의를 들을 때였다. 당시 나는 베데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압도된 상태였다. 수강생 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민족주의란 근대가 발명한 세계관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지양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이야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를 보여주셨다.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발표했던 학생도 영화가 끝날 때쯤 펑펑 울어 눈이 부었더랬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목숨 건 사람과 민족주의를 위해 목숨 던진 사람을 비교하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특히나 우리는 영화를 보며 재일조선인이라 차별받고 멸시받는 장면에서 격하게 분노했다.
일본 내 재일조선인과 같은 존재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한국도 물론이다. 계층, 성별, 민족, 성 정체성 등등 여러가지 구분에 따라 차별하고 혐오하는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2016년에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은 우리사회에 혐오 범죄의 위험성을 각인해준 계기였다. 혐오, 차별과 관련한 행위는 물론 언어 표현까지도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설득력을 얻는 현실이다. 최근에 출간된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가 바로 이러한 혐오, 차별에 관한 문제를 법적으로 검토한 저작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이러한 법을 만들었다. 특정 집단을 혐오하는 법을 금지하는 헤이트스피치 대책법을 시행하고 있고, 일본 법무성은 헤이트스피치 근절을 위해 만화책을 펴내는 등 국가 차원에서 법적 조치를 포함한 여러 가지로 노력한다. 비록 법안에 한계가 있고, 일본이 도쿄 올림픽을 겨냥하여 자국 브랜드 인지 향상을 위한 조치일 뿐 진심 어린 움직임은 아니라는 비판적 시선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일본사회도 혐오, 차별 근절을 위해 뭔가를 계속 하는 듯하다.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쓴 『차별 감정의 철학』은 이러한 일본의 분위기 - 정부 차원에서 법적 조치를 포함해 다양한 방법으로 혐오, 차별을 근절하려는 움직임 - 에 회의를 표하는 책이다. 본격적으로 이 책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기 앞서,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살펴 보자.
그는 칸트 전공자다. 한국에도 『니체의 인간학』 등 다양한 저서가 번역되었다. 특히 『니체의 인간학』을 보면 그의 독설과 독창적인 해석을 즐길 수 있는데, 이 책은 니체 신화를 부수는 책이다.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에게 니체는 그저 자신도 약한 사람이면서 약자를 욕한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니체의 반골 기질은 그가 대학 사회에서 철저하게 따돌림 당했던 사건, 사랑했던 여성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굴욕, 절친이라 여겼던 바그너로부터 소외된 아픔에서 기인하지 결코 그의 천재성이라 칭송할 필요는 없다는 내용.
『차별 감정의 표현』에서도 군데군데에서 현상을 향한 저자의 남다른 시각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에게는 타자를 구분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차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본능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차별하고 싶어하는 본능은 크게 두 가지에서 기인하는데, 첫째는 타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감정이고 둘째는 자신을 긍정하려는 감정이다. 전자가 불쾌, 혐오, 경멸, 공포이고 후자는 자부심, 자존심, 귀속의식, 향상심이다. 최근 한국사회에 부는 자존감 열풍을 차별ㆍ혐오와 관련해 사유한다면, 이러한 자존감 긍정이 과잉으로 치닫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야 다들 인정하는 부분일 터.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하고 싶어하는 감정에 취약한 사람은 누구일까? 교육 수준이 낮고,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이 더 이런 차별, 혐오에 취약하리라 생각하지만 저자는 정반대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인용하며, 성실하고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민감한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차별, 혐오에 더 물들기 쉽다는 게 저자가 내리는 진단이다.
다시 확인하자면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닌, 모든 도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퇴폐주의자가 아닌, 오히려 죄책감이 강하고 소심하고 선량한 시민이기에, 차별 감정으로서의 경멸에 매달린다. (91쪽)
저자의 말이 맞다.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인, 대학 교수, CEO의 특정 집단을 향한 편견 가득한 혐오 발언을 접할 수 있는 곳이 지구 아니던가. 이런 사람은 누구보다 더 성실한 덕택에 그 자리에 올라간 자들이다. 이렇듯 그 누구도 차별ㆍ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법으로만 규제하려는 시도는 굳이 프로이트 심리학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더 비극적인 결말로 매듭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까.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분석을 제대로 따라간 독자라면, 굳이 결론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다. 차별 감정을 근절할 수는 없으므로, 결론 부분에서 제시하는 이야기가 해법이 아니라는 걸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영원한 평화는 불가능하고, 인류 사회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끊임 없이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고, 차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내가 대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법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별, 지역, 인종, 민족, 성 정체성, 소득, 자산 등등에 기반하여 다른 사람과 구별지으려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허벅지를 꼬집도록 하자. 우생학적 논리가 근저에 흐르는 혈액형으로 본 심리 테스트는 재미로라도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