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코 선생님, 설마 여기에요? 여기가 우리의 새 직장이에요?”
“맞아.”
진구지는 이끄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풍경한 방이다. 회색 벽에 회색 바닥에 회색 천장, 형광등 두 개. 가스버너와 싱크대. 끄트머리가 찌그러진 철제 책상이 하나, 녹슨 의자가 두 개. 책상에는 필통 하나와 현미경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너무 휑뎅그렁하지 않아요? 전자 차트는요? 컴퓨터는요? 복합기는 어디 있어요?”
키리코는 어리둥절했다.
“그런 것까지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무는 다 종이로 볼 거야. 글자는 깨끗하게 써 줘.”
“처치용 기구며 멸균기도 없는 것 같은데요?”
“최소한의 도구는 그 필통 안에 들어 있어. 멸균은 버너와 압력솥으로 하자.”
“하다못해 방이 두 개는 더 있어야죠. 여기가 진료실이라고 치고, 대기실, 처치실…….”
“모조지를 걸어서 칸을 나누면 되잖아?”
머리가 어찔했다. 무사시노 시치주지 병원에서는 로봇이 약제를 운반했는데,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했다. 역시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
진구지의 속도 모르고 키리코는 태평하게 말했다.
“멋대로 굴다 병원에서 쫓겨난 몸이잖아.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지.” --- p.12~13
“나, HIV 양성이래.”
오른손을 들어 올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뭐?”
약 포장지를 종이봉투에 다시 넣고 가방에 넣으며 미호가 빠르게 말했다.
“틀림없이 슌타도 감염됐을 거야. 그러니까 병원에 가 보는 게 나아. 일단 그것만 알려 주려고. 숨기긴 싫으니까.”
슌타의 머릿속에서 온갖 말들이 어지럽게 오갔다. --- p.24
“혹시……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완치되는 건가요?”
“생활에 지장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6개월 이상 검출한계 이하를 유지하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더라도 감염 리스크는 제로라고 봅니다. 평범한 사람과 똑같다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거의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요. 수명에 큰 영향이 없다는 연구 데이터도 있거든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평범하게 아기도 낳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어요. 아, 그래도 모유는 좀 위험하니까 아기한테는 분유를 먹여야 하지만요.”
미호의 얼굴에 빛이 비쳤다. 굳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 정도가…… 다예요?”
“말씀 드렸잖아요? 무서운 병이 아니라고요.”
“놀랐어요. 끔찍한 이야기만 들었거든요. 미지의 병원체라 대처법도 없다든가, 원래는 원숭이한테서 감염된 병으로 인류에게는 치명적이라든가…….”
“멋대로 퍼져 나간 유언비어는 물론이고, 의학의 진보로 시대에 뒤떨어진 정보도 많거든요. 어중간한 지식이 가장 위험해요.
편견이나 차별로 이어지거든요. 실제로 게이들이 걸리는 병이라든가, 마약중독자들이 걸리는 병이라든가, 제대로 된 통계도 보지 않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아직 적지 않아요. 하지만 올바른 지식을 익히고 냉정하게 대처해 나가면 싸울 수 있어요.” --- p.49~50
“선생님은 안 그래요? 병원에 가는 게 안 무서워요?”
슌타는 신기하다는 듯이 키리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섭지 않아요.”
“왜요? 뭔가 이상한 병에 걸렸단 걸 알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상한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는 편이 더 무섭지 않을까요?”
“이상한 약을 먹일지도 모르고요.”
“약이 의심스러우면 확인을 하든지 직접 알아보면 되잖아요.”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요.”
왜 이해를 못할까, 하고 슌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깔끔하게 모양을 잡아 놓은 삐죽삐죽한 머리가 흐트러졌다.
“아, 그렇지. 이거야. 병원에 가면 사실은 자기가 앞으로 며칠 뒤에 죽는다고 알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면 무섭잖아요?”
“그렇진 않은데요.” --- p.76
나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가는 걸까. 아무도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모두가 나를 버렸다. 나한테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걸까.
여전히 묵직한 몸을 끌면서 흐느적흐느적 세면대로 향했다. 슌타는 땀 냄새에 전 셔츠를 벗어 던지고 문득 거울을 보았다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등에 먹물을 잔뜩 뿌려 놓은 것처럼 검붉은 무늬가 퍼져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반점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오히려 정상적인 피부색이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괴물.
이상한 외모에 반사적으로 혐오감이 들었다. --- p.114
키리코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조금 쌀쌀해서 여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린 직후였다. 조금씩 목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기침이 멈추지 않고 나오다 결국 기관지가 딱딱하게 수축하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어머니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 키리코를 안고 달려 나갔다. 아버지가 일어나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그러는 동안 괴로워하는 키리코의 손에 사탕을 하나 쥐여 주었다. 파랗고 불투명한 사이다맛 사탕이었다. 사탕을 입에 넣고 빨면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이내 가슴 안쪽에서 발작이 치밀어 올랐다. 용암이 대지를 뚫고 분출하듯 기침이 뿜어져 나오며 사탕이 어딘가로 굴러갔다. 목소리가 들리고, 키리코에게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손을 잡아끌며 하얀 자동차에 태웠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 p.186~187
“엄마가 입원해서 불안해?”
엄마가 조심스레 살피듯이 묻자 카즈는 솔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응……. 쓸쓸해.”
“미안해. 조금만 참으면 돼. 금방 건강해져서 돌아올 테니까. 알았지?”
위로해 주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다. 가장 힘든 사람은 엄마일 텐데. 카즈는 미간을 찡그리고, 드레싱도 뿌리지 않은 양상추 덩어리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