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일본 가문의 상속자 오타 세이조와 한국 여성 김일엽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태신의 자전적 이야기에 따르면, 김태신은 도쿄에 있는, 오타 세이조의 친구 신토 아라키아의 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김일엽은 자신이 그와 결혼할 수 없으며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전하는 편지 한 통과 함께 갓난아기를 오타 세이조에게 맡기고 떠났다. 자신이 일엽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김태신의 말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하지만 그가 일엽의 아들이든 아니든, 김태신의 책은 사실에 입각한 책이라기보다 김일엽의 삶에 관한 허구적인 초상에 가깝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그 책이 전하는 일엽의 삶에 관해 정보 역시 오류로 점철되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음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 p.91, 「2장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중에서
‘김일엽 평전’ 형식의 이 책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사건과 사건의 배경에 있는 사상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에도 역시 중점을 두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김일엽에 ‘대한’ 책인 동시에, 독자가 김일엽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하는 실험적 글쓰기이기도 하다.
--- p.14, 「머리말」중에서
작가, 신여성, 승려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서 일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일엽이 출가하기 전의 삶과 그 후의 삶이 전혀 다른 별개의 삶이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그 두 삶이 좀 더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필자는 이미 출판된 몇 편의 논문에서 일엽의 생애의 두 국면이 일관된 주제, 곧 ‘자유의 추구’라는 주제를 드러낸다고 주장해왔다. 출가하기 전 김일엽은 사회가 그녀에게 부과한 여성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에서 자유를 추구했고, 출가한 뒤의 김일엽은 인간 존재의 한계에서 자유를 추구했다.
--- p.176~177, 「4장 나를 잃어버린 나」중에서
일엽은 출가 당시를 돌아보면서, 그때 자신이 매우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절박함을 “살고 보자!”라고 표현했다. 경허가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죽음의 실상과 직면했을 때 실존적인 위기와 절박한 심정을 경험한 것처럼 일엽도 출가 당시 삶과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해 막다른 상황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때 일엽의 스승 만공은 그녀에게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하는 공부는 ‘먼저 살고 보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공의 이러한 가르침은 일엽의 위기의식을 더욱 증가시켰다. 당시 만공이 불교 수행의 근본이라고 말한 실존적인 절박함은 일엽의 마음 깊이 다가왔을 것이다.
--- p.241~242, 「5장 화해의 시간」중에서
일엽이 사회운동가이자 지식인에서 종교 사상가이자 수행자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을 때, 사상의 주요 관심사도 역시 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여성으로 활동했을 때 그녀는 삶의 사회적 차원에 관심을 집중했다. 종교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존재의 의미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엽의 생각은 존재의 실존적 현실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세상 모든 존재 속에 두루 스며 있는 생명력에 초점을 맞췄다.
--- p.340, 「6장 여행의 끝에서」중에서
신여성으로서 일엽은 신여성들이 사회의 남녀차별 문제를 자각하지 못한 사람들을 일깨워줄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엽은 또 여성들이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 변화를 이루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도 강도 있게 주장했다. 출가자가 된 일엽은 이런 책임의 범위를 실존적인 영역으로 확대해, 한 인간의 최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의무는 그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일엽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우리가 우리 존재의 본질, 생명의 하나 됨, 공개념의 자각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일엽은 말한다.
--- p.350, 「6장 여행의 끝에서」중에서
일엽이 책을 출판한 1960년경 일엽은 이미 잘 알려진, 영향력 있는 선사였다. 그러한 일엽이 불교를 알리기 위해 책을 쓰는 일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왜 불교에 관한 글을 쓰면서 아버지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 식구들의 죽음, 자신이 겪은 외로움의 고통, 과거에 로맨틱한 관계를 맺은 연인들과의 내면적 이야기 등 자기 삶의 세세한 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쓴 것일까? 『어느 수도인의 회상』 서문에서 일엽은 당시 사람들이 종교나 진지한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과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섞어서 글을 썼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의 표현대로 “비빔밥” 같은 글을 쓴 것이다. 일엽이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본 이유가 꼭 이것 하나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일엽의 생애와 철학이라는 서술 행위를 통해, 그리고 좀 더 넓게 보아서는 우리가 삶의 경험을 철학의 의미 부여 행위와 연결하는 방식에서, 다양한 의미의 층들을 발견하게 된다.
--- p.363, 「7장 살아낸 삶」중에서
일엽에게 텍스트는 자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였다. 일엽이 쓴 세 권의 책을 모두 지배하는 형식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혹은 ‘이야기하기’는, 철학이 우리 일상의 경험에 내재된 것임을 입증하는 그녀 나름의 방식이었다. 세 권의 책 속에 담긴 자전적인 글쓰기는 일엽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고 전달하는 독특한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일어난 일들을 그 일이 일어난 맥락으로 되돌려서 인간화하려는 시도이다. 자서전적 글쓰기는, 삶에서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당사자도 분명히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이야기를 사건의 맥락으로 되돌려줌으로써 당사자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기 삶과 만나도록 한다.
--- p.373, 「7장 살아낸 삶」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