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멍에임에도 그걸 피해보겠다고 발버둥을 친 결과 나타난 게 ‘원톨로지스트’라는 신종 직업일 게다. 미국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현명하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능력을 똑같이 갖고 있는 건 아니기에, 이 신종 직업을 ‘지혜의 아웃소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영혼의 아웃소싱’도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한 게 많아진다.
--- p.29~30, 「선택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멍에다」 중에서
성공과 사랑이 따로 노는 세상을 만들자는 제안인 것 같은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성공이 성공을 낳는다. 하나가 잘되면 만사가 잘된다”거나 “성공하면 바보도 잘나 보인다”는 말은 성공과 사랑이 분리되기 어렵다는 걸 시사해주는 게 아닐까? 아니 애초부터 우문(愚問)이다. 가능하건 가능하지 않건, 이 제안에 마음속으로나마 지지를 보내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말이다. 고대 로마 시인 루컨(Lucan, 39~65)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는 게 놀랍다. “성공한 사람은 남들에게서 사랑받는 이유가 오직 자기 자신 때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 p.53, 「성공과 사랑이 따로 놀 수 있는가?」 중에서
입센이 바로 그런 허영심 때문에 『인형의 집』(1879)과 같은 명작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면, 좋은 의미의 사회적 열정으로 존중해주어야지 어쩌겠는가? “허영이 혁명을 일으켰고, 자유는 오직 그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말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프랑스혁명엔 명암이 있지만, 명(明)을 더 높게 평가한다면 이 또한 허영심의 공으로 돌릴 부분이 적지 않다는 데에 눈을 돌려야 할지 모르겠다.
--- p.91, 「허영심은 존중해야 할 사회적 열정이다」 중에서
“서울을 생물학 종에 비유한다면 이미 멸종의 길에 들어섰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조영태가 2022년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0.78, 그중에서도 서울시가 0.59를 기록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한국의 출산율이 유독 떨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엄청난 집중”이라고 했는데, 서울의 높은 인구밀도는 심리적으로 결속보다는 분리를 선호하게 만든다. 비싼 주거비용과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암담한 미래는 청춘 남녀에게 원룸과 고시원의 삶을 강요하면서 분리에 적응하도록 만든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치이는 게 일상인 사회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 될 수밖에 없을 게다.
--- p.123, 「고독은 결혼의 가장 튼튼한 기초인가?」 중에서
이렇듯 비평과 비평가에 대한 독설은 무수히 많지만, 비평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디지털혁명으로 인해 ‘비평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예전 같은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비평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건 비평가들이 비평을 위해 쏟는 땀의 가치가 어느 정도나마 인정받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비평가를 기생충으로 보는 시각은 일의 가치에 서열을 매기는 발상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각종 갑질의 정서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 p.162~163, 「비평가는 기생충이 아니다」 중에서
생존 전략이면 어떤가? 행복과 웃음의 관계는 쌍방향이다. 행복감이 충만해 웃기도 하지만, 웃다 보면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웃음은 얼굴에서 추위를 몰아내는 태양이다”고 했는데, 자주 비장미를 풍겨 추워 보이는 한국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흘러넘치면 좋겠다.
--- p.195, 「웃음은 얼굴에서 추위를 몰아내는 태양이다」 중에서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울 수는 있어도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다. 나는 신념이 가득 찬 자들보다는 의심이 가득 찬 자들을 신뢰한다.” 소설가 김훈이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의심을 긍정하거나 찬양한다고 해서 사사건건 남을 의심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 확신이 지나친 독선적인 사람들 들으라고 한 말로 보는 게 좋겠다. 요즘은 정치 논쟁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걸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의심을 찬양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할 것이다.
--- p.226~227,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수는 없다」 중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그 누구건 이 역사가들처럼 얼마든지 자기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돌려서 말하는 것도 좋고,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릴 수도 있다. 독일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진 못한다”고 했고,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프랑스혁명이 옳은 것이었느냐는 질문에 잠시 숙고한 후에 이런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그것을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
--- p.256, 「그것을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 중에서
신념이 행동을 형성하는가, 아니면 행동이 신념을 형성하는가? 미국 사회심리학자 대릴 벰(Daryl Bem)은 행동이 감정뿐만 아니라 믿음까지도 바꾼다고 주장하면서 ‘자기지각 이론(self-perception theory)’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구체적인 신념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면서 어떤 행동을 자주 하게 되며, 나중에 자신이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이미 저지른 행동에 맞게 신념을 세운다. 일단 행동을 저지르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 p.291, 「왜 전통시장을 살리자면서 자신은 안 가는가?」 중에서
어디 생산과 규율뿐인가?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소비였다. “시민들이 쇼핑 대신 섹스에 몰두하면 경제는 곧 멈추고 말 것이다.” 미국 문화비평가 로라 키프니스(Laura Kipnis)의 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가 성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건 분명하다. 즉,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이상을 위해 우리는 쾌락, 특히 성적 쾌락을 상당 부분 희생하도록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 p.323, 「자본주의는 성적 억압을 필요로 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