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옛 애인의 아파트로 가 그녀와 함께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새벽까지 누군가와 함께 깨어 있어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래? 며칠 전에도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갔잖아. 그녀와 나는 다섯 시쯤에 눈을 붙였다. 잠들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il의 그 초원 얘기를 했다. 그녀는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멋있는 사람이네, 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우리 모두가 정상이야, 아무도 잘못되지 않았어, 아주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바지를 입는데 청바지 엉덩이에 얼룩이 하나 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시커멓지만 아주 시커멓지는 않은, 쉽게 분간되지 않는 다른 어떤 색깔이 극소하게 섞여 있는, 그런 시커먼 색의 얼룩이었다.
---「검은 초원의 한편」중에서
가르쳐주고 싶다, 심부름꾼 아이 너에게는 나만 한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읽어도 나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할 순 없다는 것을. 너는 영혼이 텅 빈 아이라는 것을.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중에서
“대학 졸업하고는 뭘 했니?” “책 만드는 일을 했어요.” “아, 인쇄소에 다녔니?” 어렸을 적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보게 되는 반응이다. 책을 만든다고 하면 인쇄소 직공인 줄 알고,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외판원인 줄 알고, 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기계공인 줄 안다.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전문대학? 하고 되묻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반응이다. 실은 나도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권투 도장 아이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도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별은 안 달았어?
---「이 친구를 보라」중에서
내가 어렸을 때 아동용 소설책과 교과서에서 읽었던 거위는 둘 다, 고요한 거위였다. 한 마리는 발가벗겨진 채 잘 구워져서 식탁에 놓여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마리, 폴크스바겐의 뒷좌석에 있던 거위는 일부러 짖지 않는 거위였다.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소설 중에 딱 한 번 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사납게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들에 둘러싸였을 때였다. 거위는 그 순간, 그 어떤 경적보다도 더 크고 사납게 짖어댄다. 자신의 꽥꽥 소리로, 그 모든 소음들을 침묵시켜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 친구를 보라」중에서
시체는 우리 이마 위에 무엇이 떠 있는지 보라고 했다. 시체의 숨에선 생선 썩은 내가 났다. 우리 이마 위엔 구름이 떠 있었다. 시체는 또, 우리 이마 위에 어떤 구름이 떠 있는지 아느냐고 했다. 우리는 흥분해서 왁왁 소리를 질러댔다. 저건 양털 구름이야. 새털구름이야. 스테고사우루스의 꼬리를 닮지 않았어? 시체는 자기가 무슨 목회자라도 되는 양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우리를 진정시켰다. 셔츠 겨드랑이 양쪽의 솔기가 길쭉하게 터져 있었고 꼬불꼬불한 터럭들이 창피하게도 훤히 드러나 있었다. 시체는 말했다, 항상 살펴야 한다고. 우리 이마 위에 어떤 구름이 떠 있는지를. 우리 이마 위로 어떤 구름이 지나가는지를.
---「구름들의 정류장」중에서
누군가 애인을 부르며 검게 그을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군가 구두의 먼지를 털며 부러진 다리를 건들거리고 있었고, 누군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터진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코를 풀자 휴지가 빨갛게 물들었고, 누군가 호주머니에서 다른 누군가의 손목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누군가 온몸에 불을 붙이곤 아주 늦어버렸다는 듯이 버스를 향해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들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구름들의 정류장」중에서
어쨌든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잊었다. 그때 내가 그랬었나, 나는 과거가 싫다고? 그래서 너도 그랬었나, 이따위 재미없는 과거라면 자기도 잊고 싶다고? 사실 그건 과거도 아니었다. 우리는 과거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과거라고 하면 흔히 기대하곤 하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과거였으니까. 그래서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잊고자 했을 때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잊고자 하지 않아도 얼굴만 맞대고 있지 않으면 절로 잊힐 과거였던 것이다.
---「아주 작은 한 구멍」중에서
“아버지는 겁이 많았지. 아이들을 후원한 건 무서워서였어. 너 같은 애들이 무서워서였다고.” “너 같은 애들?” 그는 트림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너 같은 애들. 너 같은 애들이 자라나서, 이놈의 재산을 다 빼앗아갈 거라고 여겼거든.” 나는 기가 막혀서 절로 고개가 들렸다. 엉뚱한 얘기는 계속됐다. “……너희가 자라면서 세상에 원한을 품지 않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손을 좀 써둔 거였어. 심성이 거룩한 부자도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 아무튼 빨갱이니 뭐 그런 걸로 난리를 치던 때였으니. 너 같은 애들은 워낙 없이 살아서, 크면 다 빨갱이가 될 거라고 여겼던 거야. 빨갱이가 돼서 현관을 박차고 들어올 거다, 뭐 그렇게.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방법은 모르겠고, 그래서 너흴 후원했던 거지. 아마 거의 사명감 수준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중에서
나는 정신없이 동전을 쏟아 넣고 버튼을 눌러댄다. 암은 번번이 비껴나간다. 예전의 그 사내가 내게 무어라 그랬더라, 여기서 미친 듯 동전을 쏟아 넣으며 헛손질만 하던 그 사내가 뭐라 했더라, 난 지금 저 늑대를 노리는 겁니다, 그랬던가. 선글라스에 흰색 기타를 안은 저 늑대 말입니다, 그랬던가.
---「인형의 조건」중에서
횡단보도를 이쪽저쪽에서 건너는 행인들은 아주 가끔, 내게 눈을 돌린다. 나는 어깨를 턴다. 나는 유순하게, 운명에 순응하는 얼간이처럼, 어깨를 털고 진창들 사이를 걷는다. 난 이 거리를 너무 사랑해. 내 이들은 담배 필터를 끊어버릴 듯 잘근잘근 씹는다. 내 침은 더할 나위 없이 누렇고, 이제 본드나 마찬가지다. 내 으르렁 소리는 더 거칠어진다. ‘너무 사랑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나는 그 여자애를 다신 만나지 않았다. 그건 한 번 봤으면 됐지, 두 번 세 번 볼 영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나, 그랬었나? 여자애는 언젠가 앙탈을 부리며 말했다. 너무 사랑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 누가 이 거리를 떠나라고 한다면, 난 미쳐버릴 거야. 물어뜯어버릴 거야. 이 거리에서 난 인생을 배웠어. 이 거리가 내 스승이고, 이 거리가 부모고 친구고, 내 종교야. 씨발, 좆같은 세상.
---「진창 늪의 극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