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짐이 없으면 자아가 고착될 가능성이 커진다. 고착이란 변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는 것이다. ‘자아정체성 확립’이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만약 내 자아정체성이 ‘확립’된다면 나는 끔찍할 것 같다. 내가 아는 내가 매번 같다니, 삶이 얼마나 재미없을 것인가. 자아란 확립되고 고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부를 통해서, 다시 말해 스킨십을 통해서 자아를 재창조하는 것은 단지 욕망의 문제도 아니고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창조적 변형의 문제이다. 그러니 내가 너를 만지는 이유는 너의 세계를 열어주기 위해서고, 네가 나를 만져주기를 원하는 이유는 나의 자아를 키우고자 함이다. (…)잘 만지는 사람과 사랑해야 한다. 스킨십이 창의적인 사람은 생각도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는 만짐을 당해보고 판단해도 좋겠다.
---「스킨십은 모름지기 창의적이어야 한다」 중에서
실제로 사랑은 우리의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다 끌고 하는 것이다. 연인을 만났다고 그 삶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연인 앞에서 삶이 벗겨졌을 때, 그 벗겨진 삶을 연인이 이해하고 위로해줄 때,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
서른에도, 마흔이 넘어도, 예순이 되어도, 사랑이란 건 언제나 젊다. ‘젊다’는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설렘과 실수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동사다. 끊임없는 행동과 그 행동에 맞먹는 적극적인 후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근성으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젊음’이고 ‘청춘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청춘’이다.
사랑밖에 모른다고 슬퍼하는가? 사랑밖에 몰라도 된다. 진짜 사랑은 사랑 이외의 전부를 가르친다. 신뢰와 존경과 배려와 안정과 노력하는 법과 나 자신을 읽는 독법과 고통을 견디는 내성까지. 사랑으로 사랑을 배울 수는 없지만, 사랑 이외의 것은 배울 수 있다.
---「불행히도, 당신을 사랑해」 중에서
어쩌면 사는 일은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자신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터에서, 학교에서, 하물며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비난을 받는다. 미니홈피나 어쩌다 단 댓글에 대해서도 비판을 당한다. 그런 비난과 비판은 이 세계 전체가 경쟁체제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 비난은 다반사고 자기 긍정은 힘겹다. 그러므로 칭찬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칭찬은 단지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이끌고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힘이 있는 언어다.
---「그 원피스 참 잘 어울리네요」 중에서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모든 ‘먹는다’의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라고 했지만, 어미로서 새끼의 밥벌이를 하는 경우엔 좀 다르지 않을까? 김훈의 경우 가장으로서 밥을 벌어야 한다는 책무가 그 자신이 거리로 내몰렸다는 비애를 느끼게 했겠지만, 어미는 다만 새끼의 까만 눈동자와 하얗게 살이 오르는 볼을 떠올리며 신나게 혹은 너무 행복해서 약간은 슬프기까지 한 기분으로 밥을 벌러 간다.
(…)밥벌이는 가슴 벅차고 뭉클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새끼의 오물거리는 입을 봐도 그렇고, 배우자의 피로한 웃음을 대해도 그렇고, 밥벌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들을 봐도 그렇다. 신이 인간에 대해 가장 부러워하는 게 다름 아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라는데,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신이 부러워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인간은 밥벌이를 하면서 온갖 슬픔과 피로와 모호한 행복과 뜬금없는 감격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밥벌이의 뭉클함」 중에서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서로의 결핍을 보여줌으로써 발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나’의 결핍이 ‘너’의 결핍을 만날 때 사랑이 형성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할 수 있다. 결핍은 어떻게 해도 잘 사라지지 않는 질긴 것이기 때문이다. 만족감이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면, 결핍감은 지속적이고 자주 덧나는 습관 같은 것이다.
---「노래방, 목소리를 잃은 자들의 고해소」 중에서
[연애시대」 중에서라는 드라마를 나는 잔류하는 에너지를 낭비하기 위해 보았다. 매일매일 폐기해야 하는 에너지가 일정한 날들이었다. 나는 요실금 환자처럼 감정을 찔끔거리며 [연애시대」 중에서를 보았다. 실제로 ‘감정실금’이란 게 있다. 쓸데없이 과도하게 비질거리며 흘러내리는 감정, 그것을 버려내어야 다음날 일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줌마들이 ‘드라마 폐인’에서 ‘드라마-인문-폐인’이 되기를 바란다. 찜질방이나 찻집에서 드라마에 대한 여러 담론들을 펼치면서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여주인공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 시대 여성의 욕망을 성토하며, 남성의 콤플렉스를 수집하고, 주위의 남자들을 품평하는 즐거움도 누리면서,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욕망과 콤플렉스와 사랑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다.
---「드라마, 인문폐인으로 보라」 중에서
가족에게도 공동의 트라우마란 게 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서로 치유해주고 쓰다듬어주는 가족은 좋은 가족이다. 모든 가족이 다 그렇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우리 주변의 많은 가족들이 그 공동의 트라우마를 모른척한다. 아예 그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가족도 있다. 문제는 가족 중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치유 받고 싶어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모른척하려 하거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상대를 거부함으로써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경우다. 트라우마를 모른척하는 것,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행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가족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막는 것이다.
(…) 어느 날 밤, 엄마랑 같이 자면서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우리 칙칙한 과거 얘긴 하지 말자.” “그럼 무슨 할 얘기가 있노” “많잖아, 시 얘기를 해도 되고, 앞으로 생길 좋은 일들을 얘기해도 되고.” “피이.” 엄마는 “피이” 하신다. 나도 안다. 우리는 계속 칙칙한 과거 얘기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때마다 그 칙칙함은 조금씩 맑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내 새끼가 슬퍼서 울면 나도 꼭 눈물이 났다. 그런데 엄마도 그랬다. 내가 우니까 엄마도 울었다. 마흔셋의 나이든 딸이 부끄러워하면서 쭈뼛쭈뼛 우니까, 예순넷의 엄마도 민망하신 듯 주섬주섬 눈물을 감추셨다.
이 세상 어미들은 알고 있다. 새끼가 새끼로서의 권리를 다 누릴 때 어미는 어미로서 뭉클하고 뿌듯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어미와 새끼의 행복이라는 것을.
---「엄마, 나를 부탁해」 중에서
‘낯섦’을 언제나 일깨워야 한다.(…)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남편과 아내는 각각 변화하고 있다. 달라지고 있는데 항상 ‘그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서로를 잘 앎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중에서
사랑은 환대(hospitality)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철학자 데리다는 진짜 환대는 없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고 존엄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년의 그들은 영화 속에서 계속 말하고 있었다. “사랑 이외엔 아무것도 없어, 그것이 진정한 존엄이고 환대야.”
우리는 그동안 사랑에 너무 많은 다른 요소들을 섞고 있었다. 사랑에 명예를 더하고, 지위를 섞고, 외모와 스타일을 바르고, 돈을 더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다른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풍성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닌 것 같다. 진짜 사랑은 끊임없이 빼기를 하는 과정이다. 그 사랑 속에 사랑만 앙상하게, 혹은 위태롭게 남을 때까지.
---「사랑은 진정한 존엄이고 환대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