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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화

: 꽃을 사르는 불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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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45g | 145*210*30mm
ISBN13 978890116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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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경민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나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고루 경험하며 성장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던 중 1426년 한성대화재의 기록에 주목하여 관련 자료들을 섭렵했다. 한성대화재 당시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들은 사형에 처해졌으나, 성종 때 다시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자 한 대신이 “당시 범인들을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들이 진짜 범인인지 의심스러웠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라고 고한 부분에 착안하여 《멸화-꽃을 사르는 불》의 스토리를 구상했다. 자음과모음 카페에서 연재된 이 소설은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폭발적인 조회수를 달성했다. 현재 근대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신작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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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판의 개냐?”
강문은 남자가 손을 뻗어 재갈을 벗겨내자마자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던졌다. 턱이 덜덜 떨리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일순 강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 새삼 나를 보니 그때 일이 두렵기도 했겠지. 그렇다고 구정물 치워 준 공을 이렇게 갚는 것이냐? 십 년 동안 입 꿰매고 산 보답이 이것…… 아아악!”
그는 말을 맺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가 인두 하나를 들어 그의 넓적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살 타는 내가 진동했다. 남자는 생살이 눌러 붙은 인두를 들어 살펴보다가 다시 강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반대쪽 다리에도 똑같이 인두를 내리눌렀다. 좀 전보다 더 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디다 뒀지?”
강문은 귀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찾는 것. 바닥에 풀어헤쳐진 자신의 봇짐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들이 찾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알고 싶은가? 네 주인이 찾아오라던가? 말 잘 듣는 개로군.”
강문이 입술을 오므려 소리를 냈다. 흡사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였다. _8~9쪽

“소사자의 상태는? 타 죽은 거냐, 아니면…….”
덮어놓은 천을 젖히던 의준의 손이 공중에서 딱 멎었다.
“흉하지요?”
엽복이 슬쩍 끼어들었다.
“고문 후 불을 질러 죽인 듯싶습니다. 검안을 해봐야 알겠지만 그전까진 숨이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몸이 뒤툴린 꼴을 보아하니……. 그럼 저 몰골로 죽는 것만 기다렸다는 건데, 에구…….”
엽복이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멸화군 삼 년차에 온갖 꼴을 봐왔지만 이번처럼 흉측한 소사체는 처음이었다.
의준은 횃불을 들어 시체 가까이 가져갔다. 불빛에 낱낱이 드러난 시체의 상태는 더 끔찍했다. 원래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문드러진 살만 남아 있었다. 인두에 몇 번이고 짓눌린 자국이었다. 부릅뜬 눈은 흰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_33쪽

“마님, 제가 하겠습니다요.”
정씨부인이 사랑채에 오를 기미를 보이자 노복이 싸리비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대감마님, 기침하셨습니까?”
노복이 방 밖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안에서는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정씨부인이 눈짓을 하자 그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쥐었다.
쾅!
폭발음이 들린 것과 노복의 몸뚱어리가 공중에 뜬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리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정씨부인의 눈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고, 창호지문이 뜯겨 마당에 나뒹굴었다. 노복은 문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버렸다. 시커멓게 그을린 몸에서 나는 탄내가 그녀에게 훅 끼쳐왔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노복의 몸은 이미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_156쪽

“나 믿소, 항아님?”
“에?”
“날 믿느냐 말입니다.”
채령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호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자와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것도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애초에 궁녀와 멸화군이 이렇게나 얽히게 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기이하고 끈질긴 인연. 그러나…….
채령은 호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이 사내를 믿는다. 그것은 비단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_200쪽

“오밤중에 이 웬 칼부림이십니까?”
“잡생각 몰아내는 데에 이만한 것이 없지.”
“호오, 나리께서도 그러실 때가 있습니까?”
“많지, 아주.”
순순한 수긍에 호림이 잠깐 방심한 사이 의준이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해왔다.
“이를테면?”
“사내가 하는 잡생각이란 뻔하지 않느냐.”
“여인도 품고 싶고, 이런 한직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에 대한 한탄도 하고 싶고?”
“부정하지 않으마.”
또다시 쉬운 수긍에 칼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의준이 한껏 몰아붙였다. 겨우 막아낸 호림이 다시 입을 놀렸다.
“은애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있을 때도?”
내리누르는 힘에 호림이 몇 발자국 밀려났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도?”
이번에는 의준이 밀려났다.
---pp.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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