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깡을 다 먹은 우두머리가 남자 앞으로 어슬렁 거리면서 다가왔다. 우두머리와 남자 사이에는 촘촘한 울타리의 쇠창살이 가로 막고 있었지만 사이는 불과 2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놈은 남자와 키를 맞추기 위해 울타리 두 개를 잡고 허공에 매달렸다. 콩기름에 전 창호지 같은 피부 중앙에 뚫린 두 개의 콧 구멍에서 시큼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남자가 고개를 좌측으로 틀면 놈도 똑같이 따라했다. 놈의 눈동자가 남자의 눈동자를 따라 움직였다. 순간 남자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울타리 밖에 선 것은 그 넘이고 울타리 안에 갇힌 것은 남자여서 그 놈이 일요일 오후 철 지난 유원지를 찾은 행락객처럼 남자를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세등등하게 병원문을 밀치고 나갔던 간호사는 아침잠을 늘어지게 잔 후부터 조금씩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새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시골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배춧값이 폭락해서 뽑지도 않은 배추가 밭에서 썩고 있다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냐고 그녀는 이미 끊긴 수화기에 대고 악다구니를 했다.

늦은 아침을 먹은 후 그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시장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반대방향으로부터 점심을 먹으러 나온 남자 은행원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길을 막고 올라오는 그들을 피해 길가에 잠깐 피해서 있었지만 그 남자들 중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분으로 가린 기미와 피곤이 햇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시든 파처럼 보였다. 그녀는 시장에 가서도 한 번에 신발을 사지 않고 여러 군데의 신발 가게를 기웃거렸다. 너무 많은 샌들을 꺼내 입구에 늘어놓았으므로 주인 여자는 조금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신발을 골랐다. 돈을 지불한 후에도 샌들을 신고 가게 안을 몇바퀴 걸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발가락을 눌러보기도 했다. 그녀는 교대시간보다 조금 늦게 병원에 나타났다. 그녀에게는 캐고 캐야 할 감자알들이 아직도 많았다. 여러 번 신어보고 신중하게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샌들은 그녀의 발가락에 새로운 물집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