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마. 왜 내 카우치 요청을 수락해준 거야?”
“음… 사실 약간 고민하긴 했어. 네가 내 첫 남자 게스트거든.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겠어서, 네 카우치서핑 프로필을 자세히 읽어보고 사진들도 다 확인했어. 카우치 요청메일이 예의발랐고, 프로필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더라. 착한 사람처럼 생겼더라고. 그래서 수락했는데… 사실 어제 봤을 때 사진하고 달라서 좀 놀라긴 했었어. 실수한 건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고.”
그녀가 뭔가를 더 이야기 할까 말까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런데, 넌 내 프로필 읽었어?”
“그럼, 당연하지.”
“여자 게스트를 선호한다고 써놨는데, 왜 나한테 카우치 요청을 했어?”
“어?”
순간 당황했다. 카우치서핑은 호스트가 선호하는 성별을 자신의 프로필에 표시해두어 조건이 맞는 사람을 서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성별 외에 나이, 언어, 흡연여부, 애완동물 유무 등도 있다. 하지만 사실 카우치 요청 메일을 보내기에 급급해서 전체 프로필을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여자를 선호한다고 써놨다니, 뭐라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 p.12
카밀라가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누운 지 20여분 정도 지났는데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혹시 내가 남자라서 불편한 건가? 그녀도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남자와 단둘이 자는 건 처음인 건가? 카우치서핑 경험은 있다고 했는데… 아니면… 에이, 설마! 빨리 잠을 청해보려고 몸과 마음을 완벽취침모드로 변경했지만 이미 시작된 생각은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외국인은 한국인들보다 성적으로 훨씬 개방적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머리 속 어딘가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오랫동안 솔로로 길 위에서 살다가 갑자기 만난 아가씨들 덕에 남자의 본능이 살아나려고 꿈틀대는 건가? 내가 이런 생각 중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밀라는 계속 뒤척거리고 있었다. 이런 얄팍한 욕망 따위에 당할 내가 아니다. 이러려고 길 위에 나온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안의 욕망이라는 악마와 잠시 실갱이를 벌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카밀라 쪽을 바라보았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창문을 통해 얼핏 들어오는 빛에 비친다. 편안한 얼굴로 미소짓는 듯이 1미터 너머에서 자고 있는 카밀라의 얼굴을 보니, 나 혼자 정신병자 같은 상상을 한 게 어이없어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 p.22
내 이름은 리베르따스(Libertas) 2세. 광섭군과 함께 세계일주를 시작했던 위대한 자전거 리베스따스 1세의 후계자다. 리베르따스는 라틴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이 이름을 지은 것도, 물이 다 끓었다며 싱글벙글하는 저 인간의 소행이다.자유라. 내가 다른 자전거들보다 괜찮은 처지이긴 하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이 우리 종족의 숙명이자 본능이다. 그러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루 느끼며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는 지금의 처지가 감사할 일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다만 문제는, 내 파트너인 광섭군의 욕심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때문에 내가 광섭군의 짐덩이 80kg를 매일같이 이고 끌고 다녀야 한다. 짐을 실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내 꽁무니에다가 돌돌45라는 이름의 짐수레까지 달아 놓았다. 날렵한 내 옆구리에 주렁주렁, 이게 뭐야. 내가 파트라슈냐? --- p.23
나타샤가 점심 준비를 시작하자, 니콜라이가 혹시 술 마시냐고 물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여행 중이라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더니, 불가리아에 왔으면 라키아 맛을 봐야 한다고 하며 한 잔 따라준다. 자신이 직접 자두에서 양조한 것이라며, 베스트 퀄리티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괜찮다는 설명이 붙었다. 직접 양조했다니, 이 니콜라이라는 친구는 대체 어디까지 날 놀라게 만들 수 있는 건가? 이어서 빨간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또 하나 꺼내온다. 안주로 꺼내온 그것은 파프리카 절임이었는데, 역시 직접 재배한 파프리카로 만들었다고 했다.
라키아는 생각만큼 독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파프리카 절임이 너무 맛있었다. 그동안 길 위에서 만난 어떤 절인음식보다도 최고였다. 팬 위에서 적당히 파프리카를 구워서 껍질을 제거한 뒤 식초와 올리브오일 등 각종 향신료를 넣고 숙성시키면 된다는 이 절임을 지금까지도 불가리아 최고의 음식으로 꼽는다. 집에서 직접 구운 빵과 콩 스프, 토마토와 올리브, 그리고 오이에 크림치즈를 버무려 만든 샐러드와 파프리카 절임까지. 나타샤가 만든 홈메이드 점심은 건강식임은 물론이고 맛도 좋았다. --- p.31
주먹만한 얼굴에 커다란 눈동자, 오똑한 콧날,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 하얀 블라우스에 스키니진을 입은 그녀는 미끈한 몸매를 비트에 맞추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동양인이라 신기해서 쳐다보는 건가? 아니다. 그만 바라볼만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왠지 모를 부담감에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이내 찾아오는 궁금함에 다시 쳐다봤다. 그녀는 그때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걸어오는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저 걸음의 목적지가 나라고 확신했다.
우리 그룹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던 그녀는 먼저 다나이와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차례차례 우리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며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녀도 곧바로 내게 다가와 말을 걸만큼 직설적인 사람은 아닌가보다. 우리 일행들 모두와 인사를 마친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술이 조금 취한 건지, 원래 발음이 그런 건지 혀 꼬인 발음으로 그녀가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니?” --- p48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오늘밤 신세지기로 한 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업무가 있어서 빨라도 2시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한단다. 헉! 아니아니아니되오! 빨라도 10시라. 그럼 늦으면 얼마나 더 늦냐고 물어보았더니 12시가 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 어떻게든 공짜로 하루 더 머물고 편하게 떠나려던 내 이기심에 천벌이 내려지는구나.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외곽도시인데 이렇게 된 거 좀 더 달려가다가 텐트를 치고 자야 하나? 동유럽 12월 날씨에 텐트 치고 자야 하는 상황이라니… 내 선택에 의해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생긴 일 같아 왠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차가운 동유럽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더뎠다. 이미 수만 번도 넘게 들은 MP3플레이어 속의 음악들도 시려오는 손끝과 지쳐가는 마음을 위로해 주기에는 무리였다.9시가 다 되어갈 무렵 상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는데, 맙소사! 크레딧이 부족하다. 전화도 문자도 할 수가 없다. 오직 상대방의 연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레딧 충전이 가능한 곳을 찾아 헤매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어보니 아마도 이 시간이면 모두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한다.
--- pp.5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