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여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지구인들의 꿈이다. 굳이 유목민의 전통을 찾지 않더라도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된 삶을 꾸려온 정착민들에게는 가 보지 않은 길,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은 열망이 내재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발견과 놀라운 경험이었던 유년시절과 달리 이미 익숙한 것들을 반복하게 된, 안정되지만 조금은 권태로운 삶에서는 호기심과 문화적 새로움이 작동할 기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게도, 오늘날 첨단 문명의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 A씨에게도 여행은 설렘이고 행복인 것이리라.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조금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무기, 그것은 독서와 여행이라 믿는다. 굳이 조르바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끔의 여행과 독서를 통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 ‘낯섦’과 ‘설렘’을 찾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낯섦’을 사랑하는 여행자라면 한번쯤 경험해 보면 좋을 특별한 외계의 나라, 쿠바.
‘오래됨과 낡음의 향연, 과거와 현재의 공존, 문명의 시계가 멈춘 땅, 총체적인 혼란, 뜨겁고 습한 날씨, 매연과 파리, 그리고 아름다운 바다.’
누군가 나에게 쿠바는 어떤 곳이냐고 묻는다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쿠바에 가기 전에는 물론 ‘혁명, 체 게바라, 헤밍웨이, 말레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시가, 모히또, 카리브해…’ 등의 낭만적인 단어들을 상상하곤 했었다. 이런 낭만의 상징들이 쿠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쿠바인들의 삶을 조금만 깊숙이 들어가서 겪어 본다면 그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고 만다. 쿠바는 그동안 경험한 다른 나라들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어쩌면 그 ‘다름’은 성과주의의 최전방에 있는 미국이나 한국과의 온도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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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땅 위에 지어져 있는 건물의 90% 이상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처럼 낡고 허름해 보이는, 첨단 빌딩의 대척점에 있는 건물이지만 저마다의 비밀을 담고 있는 듯 신비롭고,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은 그 어디에나 반짝이는 유리의 발코니 대신 형형색색의 빨래가 나부끼고 있다. 바람의 언어인 듯 춤추고 있는 옷가지들은 감출 수 없는 가난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 어디든 사람이 사는 풍경은 이러하다는 서글픔 같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의 빨래도 저들의 빨래와 나란히 빅토르의 집 발코니를 장식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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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주는 행복감의 원천은 ‘발견하는 기쁨’, ‘발견되어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어떤 여행지에서는 오가는 여행자가 너무 많아서 ‘발견되어지는 기쁨’을 향유할 순 없을 테지만. 어쨌든 여행의 즐거움이 곧 발견의 기쁨이라면 어쩌면 여행의 다른 언어는 ‘사랑’인지도 모를 일이다.
쿠바에 머무는 동안 많은 여행자들을 만났는데 처음 쿠바에 왔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킨 스쿠버를 즐기기 위해 자주 쿠바를 찾는다는 스페인 남자, 축제 일정에 맞춰 오다 보니 벌써 열 번 이상 방문하게 되었다는 벨기에 아줌마, 매해 세 달 이상을 쿠바에서 보낸다는 이탈리아 아저씨, 휴가를 즐기러 왔다는 칠레인 가족, 친구와 함께 배낭여행을 온 스위스 청년 … 모두들 쿠바에서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불편에 혀를 내두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쿠바에 매료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다시 쿠바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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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나라에는 멀리 지중해에 닿아있는 나라와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그리고 태평양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반도국에서 흘러온 사람들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 살던 이들은 온데간데없고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터를 닦고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임을 믿으며 그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다.
“공존.”
쿠바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흑인과 백인과 그들의 혼혈이 공존하는 곳, 60세가 넘은 낡은 자동차와 이제 갓 출시된 새 모델의 자동차와 말이 끄는 낡은 마차가 공존하는 곳, 1500년대에 지은 건축물과 최근에 지은 현대식 건축물이 공존하는 곳, 웃통을 벗고 현관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2센티미터도 넘게 기른 손톱에 화려한 매니큐어를 칠한 여인이 공존하는 곳.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반세기 동안 국제사회에서 경제봉쇄를 당해 온 이 가난한 나라에 다양성은 꽃 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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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쿠바를 가리켜 ‘카리브해의 진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쿠바는 천혜의 비경을 품고 있는 곳이다. 자원이 풍부하거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특별히 아름다운 땅은 언제나 누군가 탐하고 점유하는 법이다. 그게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 쿠바는 아름다운 땅이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 좋은 위치에 떠 있는 섬나라이다. 스페인도,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이 땅을 원했다. 400년 가까이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60여 년간 정신적으로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부호들이 아바나를 유흥의 도시로 이용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쿠바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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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굳이 해변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일상에서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아바나의 말레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청년,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왁자지껄 웃음이 그치지 않는 십대 아이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아저씨, 화려한 컬러로 단장한 올드카를 타고 드라이브에 나선 관광객들, 홀로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까지 말레콘에선 아침이든 저녁이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파도를 바라보아도, 베다도에서 센뜨로 아바나 방향으로 끝없이 걸어도 매일매일 새로운 스토리가 태어나는 곳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