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암흑기 때 작가 박태원 선생이 번역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당시 실의에 빠진 식민지 백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널리 애독되었다 한다. 명나라 초기의 대가였던 나관중 선생의 삼국지연의는 해방 이후에도 월탄, 김광주, 정비석 등 선배 작가들에 의해 한국어 판본 수를 늘리더니, 80, 90년대엔 낙양의 지가를 천정부지로 올린 바 있는 작가 이문열 평역본이 등장하였고, 그 뒤를 이어, 조성기, 황석영, 장정일 등 현역 작가들에 의해 ‘아무개 번역’이란 이름을 걸고 속속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들 현역 소설가들에 의해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새로운 삼국지 판본들은 저마다 안고 있는 번역상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과연 원본 삼국지연의가 담고 있는 역사관과 세계관의 골자를 저마다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달리 말해 중국 민중들을 포함한 동양의 민중들이 긴 세월을 뛰어넘어 깊이 공감하고 열렬히 환호해 온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곰곰이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 해답은 삼국지의 본래 이름이랄 수 있는 삼국지연의에 있다. 결국 삼국지연의의 세계관과 중심적인 메시지는 ‘연의演義’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할 수 있다. 그렇듯 인의론仁義論은 동아시아의 유서 깊은 가치관이자 전통이다. 비록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 주인공들이 역사 속에서 실패했고, 동아시아의 민중들은 그들의 실패를 동정하고 함께 슬퍼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실패 속에서 삶의 가치와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혹 옆 나라 일본에서 유행했듯 소설 삼국지에서 늙은 여우같은 꾀와 처세술을 배운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본질적인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구용 선생이 장장 20여 년에 걸쳐 까다롭기로 잘 알려진 원문을 한 줄도 빠짐없이 완역한 이 책 삼국지연의가 갖는 가치는 각별하다. 이는 무엇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정통성을 온전히 이어받은 책이 바로 김구용의 『삼국지연의』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원문의 서사적 스케일이나 문학적 특성을 담박하면서도 칼칼한, 화려한 치장 따위가 없으면서도 유장한 우리말 문장으로 온전히 되살려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임우기『삼국지연의』책임편집자
『삼국지연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 그 자체만을 즐기는 독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원문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려보고자 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명백하게 역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삼국지연의』의 원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김구용의 『삼국지연의』가 다시 출간되는 점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김구용의 번역본에는 『삼국지연의』의 원문에 들어 있는 시문詩文이 빠짐없이 유장한 문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삼국지연의』의 본디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인물의 삽화나 부록으로 묶인 전투지의 지형도 등도 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해서 소설로 씌어졌지만 김구용 선생은 『삼국지연의』를 마치 역사 기록을 다루는 자세로 번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서경호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