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말 그릇 키우는 법]
내면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을 거르지 않은 채 그대로 뱉어 내 괜한 갈등을 일으킨다. 또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불완전한 탓에, 자신을 지나치게 숨기거나 반대로 과시한다. 이처럼 말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담는다. -18쪽
노자는 모름지기 세상은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치세에 한정해서만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며, 나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너의 가치도 알 수 없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서부터 말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26쪽
2단계 [관점 바꾸기]
마르틴 부버는 관점 없이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주관적 관점을 제거한 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관점이 없다는 건 죽은 상태와 다름없다.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곧 그 사람의 인식 체계가 생동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최대한 관점을 없애야 할지가 아니라 더 훌륭한 관점에 기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43쪽
관점이란 필연적으로 위치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앞자리에서 뒷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내가 처한 자리를 옮기기 어렵다면, 역지사지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리를 옮기지 않고서도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린다. -46쪽
바디우 말에 따르면 진리가 되는 관점을 확립할 때 비로소 “주체적 언어”도 탄생한다. 이 언어는 기존의 지루한 언어가 아니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춘다. 그로 인해 언어생활이 전환된다. 따라서 새로 확립한 나의 관점에 충실하게 보되, 그것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리라 자만해서는 안 된다. -51쪽
3단계 [말이 깊어지려면]
지성과 견문을 더 넓히려면 어렵고 불편한 글을 읽어야 한다. 일부러 어려운 말들로 도배한 글이 아닌, 사회의 이면을 짚어 낸 관점과 사유가 담긴 글들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 나와 생각이 같은 글을 읽는 것은 그저 반복 행위이지만, 내 생각과 다른 글, 말을 접하는 것은 나를 확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60쪽
현실권력을 쥔 사람이 언어를 지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현실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다. 피지배자는 그 언어를 공부하고 내면화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역전시키는 것은 역시 해석이다. 해석이란 말씀의 감옥을 부수는 약자의 무기다. -70쪽
말할 때는 물론, 들을 때도 논점을 정해야 한다. 그저 들리는 대로 수용하는 것이 잘 듣는 게 아니다. 말의 좌우를 살펴 핵심과 논점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공자의 해석 방법이다. 공자처럼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양단을 두드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지성이 발달한다. -72쪽
4단계 [참신하게 말하는 법]
창의적이고자 한다면 낡은 것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고집과 거부감은 내려놓고 타인의 것과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나의 사고와 언어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81쪽
새로움은 단절이 아니다. 하늘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기존의 것에서 시작하자. 멋지게 자기소개나 인사말을 하고 싶다면 그런 예를 찾아 배우자. 그리고 전적으로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과, 반대로 이전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안일함을 버리자. -84쪽
말할 때에도 공백에 주목해야 새롭다. 예컨대, 칭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읽어 내지 못한 장점을 발견해 칭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상대는 색다름을 느끼고 호감을 품게 된다.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흔히 지적하는 것보다는, 공
백의 부분 즉 애써 외면해 왔던 문제점을 드러내 일깨워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91쪽
5단계 [경청을 실현하는 법]
듣기가 말하기를 이기며, 화자가 아닌 청자가 마음을 얻는다. 말을 잘해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은 강함의 기법이요, 잘 듣는 것으로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은 부드러움의 기법이다. 강함끼리 경쟁하는 세계에서 부드러움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틈새 공략’이다. 노자의 표현으로는 “은밀한 지혜”다. -100쪽
관계란 어쩔 수 없이 이해와 오해의 종합이다. 관계에는 오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해를 애써 외면하기보다 오해의 가능성을 과감하게 인정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타인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오해를 인정하는 데에서 경청은 출발한다. 상대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 듣기만 하고 판단과 이해를 유보하는 것은 배려가 아닌 도피다. 거듭 말하지만 경청은 그저 듣기가 아니다. 귀와 마음의 기울임이다. 무심 또한 아니다. -106쪽
말의 진의는 말의 행간을 파악해야 알 수 있다. 그가 스스로를 친절하다고 말한 연유와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더불어 그의 사람됨과 행동거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듯 말의 행간을 본다는 것은 곧 말 너머의 맥락까지 아울러 본다는 뜻이며, 그래야 말의 도리, 즉 진의가 열린다. 이것이 주희가 말한 말 너머까지 듣는 경청법이다. -108쪽
6단계 [잘 묻고 대답하려면]
모든 학문은 둘 중 하나만 잘해도 의의를 갖는다. 좋은 질문을 던지거나 좋은 답을 찾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답 역시 도출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좋은 문제 제기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일단 문제를 던져야 차후에 해답을 찾는 것
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흔히 질문 많은 사람을 반대만 하는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에게 해답까지 요구하는 일이 잦은데 그 탓에 우리 사회엔 질문이 적다. 이러한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118쪽
“원래 그랬어” “그런 전례가 없어”같이 역사를 곧장 규범으로 도치하는 모든 시도는 폐기되어야 한다. 오래된 것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의심하고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자. 그간 당연시해 온 것을 물어야 변화가 있고 발전도 있다. -120쪽
질문을 통해 이득을 꾀하려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사람, 질문하면 곧바로 충고와 조언이 쏟아지는 사람, 자기 말만 내뱉는 사람에게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리 없다. 심지어 어떤 상사는 질문 받기를 바라면서 막상 질문하면 그 질문조차 이렇다 저렇다 하고 평가
한다. 그러면 아랫사람은 애써 질문해 지적받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129쪽
7단계 [말하기 기술]
말 잘하기에도 정공법이 있다. 생각한 후 말하기, 과하게 말하지 않기, 배려하면서 말하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이를 지키지 않는 것 또한 현실이다. 원칙을 어기는 세상에서는 원칙만 잘 지켜도 기본 이상은 간다. 원칙에 따라 나의 언어생활을 돌아봐
야 한다. -140쪽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려면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무지한 말은 대체로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말 습관을 익히면, 말을 하다 문득 막히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내가 지금 잘 모르면서 너무 자신 있게 말하고 있구나’며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146쪽
화쟁은 현대의 화법에도 유용하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해와 동의를 마치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동의하면 그냥 이해하고, 동의하지 못하면 이해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태도보다는 동의와 이해를 구별해 동의는 명확히 하되, 되도록 이해는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148쪽
8단계 [실천할 말, 버려야 할 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평생의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말은 나와 타인 그리고 나와 세상을 이어 주는 다리다. 그러나 삶에는 말이 가 닿을 수 없는 곳이 분명 있다. 그 경우 억지로 말을 사용하면 말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그럴 때는 사다리를 걷어차듯이, 과감히 말을 던져 버려야 한다. -169쪽
노자는 묻는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과 ‘응’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냐고. 말의 형식과 예절에 집착할수록 상처를 잘 주고, 상처도 잘 받는다. 일례로 예의에 예민한 사람은 타인의 조그마한 ‘무례’에도 몹시 언짢아져 스스로 상처를 입고, 타인에게 예절을 강요함으로써 상처를 주곤 한다. -174쪽
내면의 말을 멈춘다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점철된 나의 모든 판단을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앤소니는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과 진짜 하느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덧붙인다. 나의 생각대로 덧칠한 ‘하느님’이란 관념을 지울 때, 진정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176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