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해서 사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일이다. 살 만하지 않아도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삶을 덜 부끄럽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러니까, 살 만하지 않은 때의 감각이다. 소음을 피하게 하는, 나대지 않게 하는, 고독을 수긍하게 하는, 결국엔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이치를 얼음장처럼 일깨우는. 역설적으로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읽는 책, 듣는 음악, 만나는 사람, 잠기는 상념, 올리는 기도는 반드시 나를 죽지 않게 해준다. 살 만하지 않은 때에 이르러서야 나를 최후에 떠받치는 삶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p.23
대학 시절 존경했던 선생은, 도망쳐 찾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일상의 고통을 마취하기 위해 도망의 환상을 부지런히 소비하던 때였다. 우선 ‘지금 여기’를 떠나면 될 것이라고 나는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고통이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존재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아는 이에게 낙원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야만 낙원 그 비슷한 길을 낼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
--- p.71
남의 돈을 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무거운 일이었다. 당장의 일도 무거웠지만, 큰 뜻이나 높은 이상이 없어도 다만 살아가려면 죽을 때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일정한 용도로 쓰일 만한 가치를 죽을 때까지 생산해야 한다는 실감이 무거웠다. 불교가 설파하는 것, 나의 두려움을 덜어주었던 것들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뭐 노상 마음에 달렸대. 마음 탓이 아닌 것도 있으니까 화도 내고 시위도 하고 투표도 하는 것 아닌가. 이른바 ‘스타 스님들’의 책이나 강연, 어록이 거슬렸다. 먹고살려면 멈출 수가 없는데 비로소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건가요. 멈추면 죽는 사람도 있다고요, 스님.
--- p.80~81
내가 나의 일과 그 일에 얽힌 사람들에게 애정을 거두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래서 가능한 한 즐겁게 일하려고 하는 것은 서럽고 고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른 서럽고 고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중략) 덜 고되게 하려고 누구는 보람을 찾고, 덜 고되게 하려고 누구는 실적을 쌓으며, 덜 고되게 하려고 누구는 파티션 너머로 쿠키를 건넨다. 기왕이면 한 번 더 웃고, 기왕이면 농담을 건네고, 기왕이면 안부를 묻는다.
--- p.153~154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충만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고 가장 구차했던 순간이 결혼에 있었다. 가장 크게 웃었던 순간, 가장 크게 울었던 순간도 결혼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었다. 결혼은 ‘좋을 때는’ 파트너와 나를 두르고 있는 담장이 너무 아늑하고 미더워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상태이고, ‘별로 좋지 않을 때는’ 이 담장 안에서 일어난 심란한 역사를 도무지 담장 밖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 세상 무력한 상태다. 그러니 결혼은 내가 저 인간을 천국에 보낼지 지옥에 보낼지 알 길 없음은 물론이요, 나 또한 저 인간으로 하여금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영문을 모르겠는 상태이기도 하다.
--- p.209
그와 나는 먼지 묻은 발가락들을 내밀고, 해결되지 않은 고민을 안고, 도시의 건물들 사이를 지나간다. 발가락들은 더 더러워지고, 고민은 어차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매번 기묘하게도 걸으면 대체로 나아지고, 함께 걸으면 더 많이 나아진다. (중략) 요 며칠, 익숙한 듯 익숙할 듯 징글맞게 익숙해지지 않는 우울이 낮과 밤을 습격했다. 좀 걸으러 가자는 말을 어제는 내가, 오늘은 그가 꺼냈고, 내일은 둘 중 하나가 꺼낼 것임을 믿으므로 전처럼 베개에 뺨을 묻지는 않는다. 나는 그것이 좋다.
--- p.257~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