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를 자유기고가라고 부른다. 내 이름 옆의 자유기고가라는 활자를 보면 남의 옷을 입혀놓은 것 같다. 그 직업은 내가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기자 노릇을 하다 쫓겨난 뒤로 밥벌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는 활자로 얘기를 꾸려서 팔아먹는 짓뿐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참 좋은, 매우 능력 있고 자유롭고 멋진 그런 직업을 내 이름 옆에 붙이게 되었는데 치열한 프로 의식을 가진 진정한 자유기고가들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나는 제대로 된 자유기고가가 못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도 공부를 지지리 못했다.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신문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노상 책이나 붙들고 앉아서 잡식성으로 대식하듯 시간이라는 것을 책을 읽지 않고서는 보낼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순전히 소설책이나 잡지책 많이 읽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문학에 재주 있는 아이라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드리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만사에 가끔 호기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일기 한 줄, 편지 한 장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것은 어머니의 만회할 길 없는 비극적 착각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당신이 왕년 소싯적에 언론계에 종사했던 연줄로 나를 한 달에 한 번씩 지역구 소식을 담아 내보내는, 말이 신문사지 지역구 주민들조차 잘 모르는 구민 월간신문사에 취직을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 못 가 당연하게 쫓겨났고 빈둥빈둥 소설책이나 읽으면서 지내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꾸려서 친구들을 통하거나 선후배 또는 어머니의 친구 분들을 통해 팔아먹고 있다.
그러므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내려가면서도 기실 나는 별 의욕이 없고 내가 어떤 얘기를 어떻게 발굴해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변변하지 못한 것은 직업에서뿐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에게 일쑤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해도 그저 그러려니 한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유년시절부터 고아원으로 굴러다니며 천덕꾸러기로 자라왔기 때문에 모멸당하는 것이 내 몫이라는 걸 일찍부터 터득했다. 오히려 어머니에게 입양되어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 그것도 뿌리 튼튼한 가정과 지식과 사회적 지위와 그럴 수 없는 인품을 갖춘 내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위치가 항상 꿈을 꾸는 것 같았고, 사람들이 부모는 출중한데 아들은 왜 그렇게 팔푼이 같으냐고 내놓고 흉을 봐도 나는 그 흉이 달콤하게만 들렸다.
그러나 사는 것이 한낱 꿈이라 해도 이렇게 황홀하도록 행복한 것인가, 이렇게 좋은 것인가 싶은 시절을 나에게 맛보여 준 아름답고 능력 있고 이 세상의 좋은 언어를 다 동원해 칭찬해도 모자랄 아내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내 같은 여성이 나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리라는 야무진 꿈은 꾸지도 않았건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아내는 처음부터 나를 버린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자타가 인정하는 못난이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눈치는 안다. 아내는 교양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잠시 별거를 하자고 말했고 나는 올 것이 왔다라고 알아들었다. 펄쩍펄쩍 뛴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는 이상으로 어머니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어서 아내를 어르고 달래고 나무라고 오래오래 얘기하고 그런 끝에 가까스로 딸만은 아내가 데리고 가지 않고 우리와 살면서 한 달에 한 번 제 엄마를 만날 수 있도록 약속하는 선에서 별거를 결정했다. 그러나 딸아이 역시 아버지인 내가 기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기르고 나는 내가 아내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잊지 않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잊지 않음의 희망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때로 내가 여자였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내가 여자였으면 결코 아버지는 될 수 없었을 테지만 엄마가 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여자들은 얼마나 복잡하고 생산적인 존재들인가. 울다가도 금방 웃으면서 상황에 적응하고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는다. 그러나 남자들은 울다가 금방 웃지 못하듯 섬세하게 적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살길과 파괴적인 길을 가리려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자 중에도 생명적인 길을 지향하는 결 고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파괴적인 길을 가리지 못하는 숫자가 통계적으로 더 많은지 그들이 남자답다라고 분류되는 건 사실이다. 아무튼 난 여자들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어지러울 때가 있다. 그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간들간들한 목소리로 호호호호 웃어대는 소리는 순수한 창조주의 음악이어서 세상의 어떤 존재도 그 미묘하게 간질거리는 아름다움은 흉내낼 길이 없다.
어떻든 나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러 갔다. 내가 피라미를 잡을지 붕어를 잡을지 옥도미를 잡아 올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도 때로 궁금한 것이 나라는 위인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을 가진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내 속을 알 수가 없다. 태어났으니 굴러다니면서 자랐고 자라면서는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취직했다가 쫓겨났다. 아이엠에프 때문이 아니라 아이엠에프가 아닌 남의 나라 돈 잔뜩 끌어다가 부자 나라인 척 기고만장하던 시절, 그러니까 외국 언론들이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빈정거리던 시절에 쫓겨났는데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고 여태 살아왔듯 살아가겠지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그런 가요를 내 친구는, 그것은 우리의'운명이었어'라고 바꾸어 부르는데 나는 공항에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었어'라고 차마 노래로는 부르지 못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두망찰해서 27번 출구 대기실을 확인도 하지 못하고 낯익은 가방을 따라갔다. 검색대 안에서 낡았으나 초라하지 않은 품위와 관록을 지닌 가방은 내 가방보다 대여섯 사람쯤 앞에 놓였고 기분 나쁘게 너덜거리는 고동색 커튼 같은 헝겊 속으로 짐을 굴려가는 벨트는 그 가방을 빨아들였고 사람은 도깨비방망이 같은 것으로 순식간에 검사를 당하고 놓여났다.
여자는 그때까지 그러니까 그 여자와 나 사이의 대여섯 사람이 짐을 찾아 들고 가버렸을 때까지, 즉 내가 내 가방을 저 혼자 돌아가고 있는 벨트에서 들어올릴 때까지 그곳에서 우물거리다가 나를 보았는데 여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의 그 고색창연하면서도 관록이 붙은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가방을 들어올렸고 여자는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를 27번 게이트로 인도했다.
"출장이야? 잘 지냈어?"
여자는 무표정하게 그렇다는 시늉을 했다. 그 시늉이라는 것이 1년 넘게 같이 산 부부가 아니고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고갯짓도 아니고 눈짓도 아니고 바람으로 슬쩍 대답을 하듯이 그러한 미세한 것이었음에도 나는 알아들었다.
우리는 1년 넘게 결혼생활을 했고 또 1년 가까이 별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 주민등록은 그대로였다. 여자는 혼자 오피스텔을 얻어 나갔지만 주민등록도 옮기지 않아 지난번 선거 때도 우리 동사무소로 투표를 하러 오는 길에 집에 들러 아이와 놀고 어머니와 무슨 얘기가 그리 많은지 수다를 떨고 온종일을 머물다 갔다. 그 여자가 우리 식구 중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은 오직 남편이던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나는 그 여자가 좋았으므로 비행기도 타기 전부터 내 입귀는 귀밑으로 올라가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은 어머니가 비행기표 같이 끊어주셨어. 거기하고 나하고 소속만 다르지 같은 소재여서 어머니하고 얘기하다가 상부상조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니고 당연했던 거야.??
내가 너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헤벌쭉거렸는지 그 여자가 내 아내였을 적과 똑같은 태도, 기본적인 친절이 몸에 밴 말투,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도도한 억양이 숨어 있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그런 것도 있잖아. 보디가드, 내가 그랬지. 언제든지 나는 그냥 보디가드만으로 족하다고."
나는 큰마음 먹고 내 딴에는 그것이 너스레라고 생각하며 이번 제주 일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잘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대꾸했다.
"보디가드는 필요하지 않아. 어머니는 당신이 이번 일로 뜨게 되기를 바라셔. 홈런을 날리라는 게 아냐. 그냥 평범한 안타만이라도 만들어 보라고. 날보고 도와주라고 하셨지만 분야가 다른데 돕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당신이 바라는 일도 아니고. 일에 한해서만은 당신 항상 날 거절하잖아.??
나는 알아들었다. 귀밑으로 올라가 있던 입귀가 슬며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걸 나는 거울을 보듯이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아내는 사진을 전공했고 이미 작가 소리를 듣고 있다. 그 방면에서는 꽤 인정을 받고 있는 재원인 것이다. 나는 아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찍은 것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른다. 아내가 상을 탄 작품사진들은 알 만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왜 상을 탔는지 알 수가 없는 것들이다. 어둠이 내리는 강물에 흰 거품이 부글거리고 강가에선 꼬마들이 싸우는 풍경화 같은 사진은 괜찮구나, 사진에서 손상되고 망가지는 자연의 신음이 들리고 거칠어진 인간의 우울함이 언어와 색채, 시와 음악으로 흘러나올 수 있구나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한두 번뿐이었다.
나는 일과 상관없이, 아니 이번에는 나도 일을 끝내주게 잘해내고 싶다는 희미한 욕망 속에서 이 여자하고 함께 제주도에 간다는 사실에 들떠서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비행기의 좌석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조금도 불만스럽지 않았다. 아내와 한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속에 뻐근하고 송구스러운 훈훈함이 번졌다. 나는 아내가 나를 버렸을 때, 아내에게 버림을 받고 무엇을 보거나 들을 때마다 시간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는 눈물 속에서 생각했다. 아내를 알았던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했던가, 아내와 함께 살았으며 아이를 얻었으며 헤어진다고 해도 아내가 어떻게 되거나 아픈 것이 아니라 그저 헤어져 살 뿐이라면 그것이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수많은 시간의 연륜 속에 우리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태어나고 만나고 사랑한 것은 얼마나 기막힌 축복인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