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은 지금 연애, 인간관계, 꿈, 희망 등 모든 것을 포기하는 중이다. 포기의 이면에는 사회와 세상을 향한 냉소가 숨겨져 있다. 어떤 냉소일까? 자신들이 이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사는데 사회가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불신의 냉소다.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오는 말들이 진부하고 추상적인 대답이라면,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실제적인 전략이 바로 냉소다.
--- p.63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은 왜곡된 세상이 만든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부작용의 결과다. 만성이 된 고통은 회복도 오래 걸린다. 또 구조적이기 때문에 개인 문제로 생각하고 각자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성적인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이름의 고통은, 함께 인내하며 풀어야 할 공동과제다. 바로 이 지점에 교회 공동체의 사명이 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인 교회는 왜곡된 세상이 만드는 악한 구조에 대항하며 건강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공동체다. 이러한 건강한 구조는 악한 구조가 만들어 낸 시대적인 다양한 고통에 민감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 p.67
왜곡된 세상의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신앙 뒤에 감춰진 성공을 향한 무한욕망과 은밀하게 연결되어 드러난다. 탐심(무한욕망)은 곧 우상숭배다(골 3:5). 우상숭배는 기복신앙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기복적 요소가 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복(물질, 건강, 자녀, 문제해결, 범사에 잘 됨 등)을 주실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복’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처럼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단일 뿐이다. 건강, 성공, 물질, 풍요, 형통함을 얻는 것이 궁극적인 신앙목표라면 예배도 얼마든지 우상숭배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자기만족을 채울 수만 있다면 누구든, 무엇이든 우상으로 섬길 수 있다. 신앙은 얼마든지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왜곡될 수 있다.
--- p.73
기복신앙의 밑바닥에 깔린 지나친 긍정은 합리적 의심, 비판, 질문을 할 수 없는 분위기로 만든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인은 몰라도 아는 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의문도 깊어지는 법이다. 왜 그런지 모르면 물어야 한다. 긍정이 당연한 분위기 속에서 질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긍정의 힘이 솔직하고 합리적인 의심과 물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거나(그래서 고쳐줘야 하는) 그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괜찮다면서 안 괜찮은) 교회는 청년들이 있기 힘든 곳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수동적이거나, 존재감이 없는 투명 인간으로 남아 있거나,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의 길을 선택한다.
--- p.76
신앙 경쟁은 고지론으로 나타난다. 고지론이란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해야 유리하듯이, 신앙인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경쟁을 통해 순위가 매겨지는 세상에서 모두 높은 자리로 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기를 기도한다. 지금 서 있는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누군가의 복의 통로가 되는 방식으로 임한다. 복의 통로는 꼭 힘 있고 능력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경쟁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약점은 나에게 기회다. 경쟁은 누군가가 내 삶에 들어올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이든 교회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삶에서 밀어낸다.
--- p.80
언제부턴가 교회는 동등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망각은 단순히 망각으로 끝나지 않고 경계함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외치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가 제시하는 자격과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다. 고대 로마 제국에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경계로 리메스라는 요새(인공 국경)가 있었다. 이 요새는 감시, 경계, 보호의 역할을 했다. 로마 군인들은 순례자나 상인이 이 요새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로마가 보기에’ 야만인 게르만족은 통과할 수 없었다.
누구나 환영해야 하는 교회도 누군가에게는 닫혀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망각의 끝은 경계다. 다양한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주 안에서 동등함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가 ‘조건부’ 동등함으로 사람들을 경계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 p.98~99
예수님과 교회는 운명공동체다. 머리 따로 몸 따로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픈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바꾸시지 않는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자신의 몸으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과거, 현재, 미래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주님의 기대와 성실하심이 있다.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의 희망이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반응할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온전한 일과 쉼의 리듬 회복을 통한 기쁨이다. 이를 위해 먼저 왜곡된 일과 쉼이 만든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고통의 자리는 회복의 출발점이다. 구체적으로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충분히’ 이뤄질 때, 고통을 넘어 회복의 기쁨이 시작된다.
--- p.102
일과 쉼은 삶의 부분이라기보다 삶 그 자체다. 사람들은 온전한 일과 쉼을 통해 온전한 삶을 원한다. 온전한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샘플이 필요하다. 주님은 ‘이미’ 나와 당신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계획대로 무엇이 잘되고,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무엇이 있어야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어떻든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샘플이다. 샘플인 우리의 일상을 돌아봐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일상을 온전한 일과 쉼의 시선으로 성찰하도록 돕는 공간이다. 성찰을 위해 멈출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필요하다. 교회 공동체는 일상에서 온전한 일과 쉼의 리듬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이자 마중물이 될 수 있다.
--- p.105
우리는 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 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빠름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빠름과 편안함이 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빠르면 빠를수록 좀 더 해야 할 일이 많아질 뿐이다. 예전에는 몇 날 걸려야 해결될 일들을 이제는 단 몇 시간 혹은 몇 분만에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쉼이 늘어나기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으며, 우리 마음은 그분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안식을 찾을 수 없다.”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쉴 수 있다. 참된 쉼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 안식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고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좀 더 해야 할 일과 밀려오는 피곤뿐이다.
--- p.120
우리는 날마다 불안하다. 돈, 진로, 성적, 취업, 이직, 건강, 관계, 집, 시험, 자격증, 결혼 등 다양한 종류의 결핍에 대한 불안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매일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삶은 위태로워 보인다. 간당간당해 보이는 매일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끝없이 원하는 우리의 욕심은 하루가 아닌 한 달, 일 년치를 한꺼번에 달라고 하나님을 압박(?)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만나를 하루치보다 더 거두면, 다음 날 아침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했다. 그들은 만나를 쌓아두지 않고 매일 거둬 먹는 방식으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늘 하루를 채웠던 것들로 충분할 수 없을까? 불안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지 말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이야기하신다. 나 어디 안 가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자.
---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