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문 세계에서 비판과 논쟁은 필수적이다. 비판과 논쟁이 없다면 그 학문은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신학사상들은 혹자의 비판처럼 단순히 논쟁에 논쟁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 신학자들이 그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타당성을 제시하려 했던 신학적 노력의 산물이다.…이 책이 우리의 신학적 사고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머리말”)
●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가능성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먼저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자기를 객체로 세우시고,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객체로 등장하심으로써 하나님 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비로소 제기된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의 제1차 주체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제2차 주체이다. 인간 주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주체이며, 제1차 주체의 행위를 따르는 주체에 불과하다.(제1부 1장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근저에 놓여 있는 세계상은 신화적인 것이다. 이 세계상에 의하면 세계는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층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하늘을 말하며, 아래층은 사탄이 활동하는 지옥을 말한다. 그 사이에 있는 중간층은 인간이 사는 땅을 말하는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세력과 지옥에 있는 사탄의 세력이 서로 싸우는 영역이다. 이 중간층 곧 인간의 세계는 하늘과 지옥에 대하여 열려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세력이 인간의 삶과 세계 속에서 작용하기도 하고, 또한 사탄의 세력이 그 속에서 활동하기도 한다.(제1부 3장 “불트만의 실존신학”)
● 본회퍼의 신학이 오늘날까지 많은 신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그가 말한 것을 자신의 삶과 순교의 죽음을 통해 실천하였기 때문이다.…베를린의 테겔 군 형무소 마당에서 어느 날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한 수감자가, 그가 그리스도인이요 신학자이면서 어떻게 히틀러에 대한 적극적 저항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본회퍼는 감시자의 눈에 뜨이지 않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술에 만취한 어느 자동차 운전사가 베를린 시내에서 고속으로 질주할 때, 이 미친 운전사로 말미암아 치여 죽은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들의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목사의 유일한 사명이 아니다. 이 술 취한 자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제2부 1장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
●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에 몰트만은 학교의 동급생 친구들과 함께 “공군 조무사”로 차출되어 고사포 중대에 투입된다. 동년 7월 연합군의 “고모라 작전”(Operation Gomorrah)을 통해 함부르크 시가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4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불에 타 죽는 와중에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는 곁에 있던 친구의 온 몸이 폭탄의 파편으로 찢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까?” (제2부 6장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국가종교 제도를 통해 정치와 종교가 결합될 때, 정치와 종교의 상업적 관계가 이루어진다. 국가는 “종교적 국가”로서 자신의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요구할 수 있게 되고, 종교는 국가의 시녀로 전락한다. 그 대가로 국가의 비호 속에서 타 종교를 탄압하고 국민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3부 1장 “메츠, 몰트만, 죌레의 정치신학”)
● 민중신학이 탈서구화를 주장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서구의 전통신학에 대한 실망에 있다. 서구신학은 “아래”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위”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 방법, 개념화 또는 체계화의 방법으로 인해 민중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간과하고 추상성에 갇혀버린다. 그것은 민중의 언어가 아니라 지배자 계층의 언어에 속한다. 이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민중신학은 탈서구화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제3부 3장 “한국의 민중신학”)
● 근대(혹은 현대) 세계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신뢰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노예매매,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세계대전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인류는 더 이상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이성의 합리성만이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며 삶의 전부가 아니다. 어떤 사물의 현실은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낸 수학공식을 통해 충분히 파악되지 않는다. 합리적 이성이 진리의 전결자가 아니다. 진리는 이성의 합리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이성과 감성, 형식성과 생동성(다이나믹) 등 다양한 차원을 포괄한다. 이리하여 근대가 합리성과 효용성을 중요시한 반면, 포스트모던은 “느낌과 이미지”를 중요시한다. 이성 대신 감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제4부 2장 “포스트모더니즘과 신학의 만남”)
●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자연과학에도 유익을 줄 수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대관절 그 힘이 이 세계의 어떤 미래를 향해,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힘과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야 하는지, 삶의 참 가치와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과학기술은 자신이 초래한 결과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자연과학은 종교 및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이 문제들의 해답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제4부 4장 “자연과학과 신학의 만남”)
● 한국 개신교회는 타 교단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자기절대화를 버리고 상호 인정과 포용 속에서 연합과 일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는 각 지역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정기적으로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를 통해 연합정신을 함양하고 지역을 위한 공동의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에큐메니컬 운동도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운동에도 인간적인 욕심이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컬 계열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비운 참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때 에큐메니컬 운동은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도 필히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제5부 2장 “20세기 에큐메니컬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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