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는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 살아도 옆집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도 누군지 모르고, 알아도 잠시 인사를 나눌 뿐이다. 시골살이가 도시와 다른 점은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어느 한쪽에서 다가가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25쪽)
이야기 끝에 내가 “우리 집에다 주막을 차리면 어떨까” 제안을 하니 다들 기발한 생각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 친구들에게 말하길, 나중에 시골 내려가 살면 주막을 할 것이라고 했었다. 술을 좋아하니까 장난처럼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좀 의미를 부여하자면 내가 꿈꾸는 주막이란 일종의 커뮤니티센터 같은 곳이다. 마을도서관이나 수다방, 아니면 마을상담소 역할도 가능하리라. 유명한 성미산마을의 마을카페가 좀 더 발전한 형태라고 할까. (43쪽)
시골생활의 색다른 즐거움은 근방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이다. 강현이와 친한 원선이는 고성에 산다. 우리 집에서 60킬로미터, 차로 40분 거리다. 도시에서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과 시골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은 매우 다르다. 안팎으로 공간의 여유가 있고 같이 나눌 일거리가 있으니 자유롭고 보람도 있다. 그런 친구가 생겨서 참 즐겁다. (58쪽)
사람들은 시골 출신이 귀촌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 귀촌한 사람들을 보면 도시 출신이 더 많다. 귀촌의 로망을 품은 사람들도 도시 출신이 많아 보인다. 산업화 시대에 농촌에서 자랐던 사람들은 가난과 힘겨운 노동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시골을 꺼린다. 시골에서 없는 집안 장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 고생한 친정어머니도 시골과 농사일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어떻게 온 도시인데 또다시 시골로 가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시골의 미래는 아무래도 도시 출신이 지키게 될 것 같다. (61쪽)
짧은 기간이지만 시골에 살면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바로 자연에의 적응이다. 시골에 오니 어릴 적 생각이 가끔 난다. 70년대,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그럭저럭 잘 살았다. 경제 성장으로 살기 편리해진 지금, 우리의 적응력은 한없이 작아졌다. 추위와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적정 기술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불편함으로 돌아가는 삶의 자세도 중요한 것 같다. (75쪽)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으면 마음공부가 되기도 했다. 오래된 잡초는 뿌리가 산지사방으로 뻗어 발본색원이 불가능하지만, 어린 잡초는 쏙쏙 잘 뽑힌다. 마음속 분노도 잡초랑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내고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면 분노는 산지사방에 뿌리를 뻗어 그야말로 ‘뒤끝 작렬’이지만, 바로 알아차리고 표현하면 앙금이 금세 사라진다. 그렇게 잡초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83쪽)
시골에서 살아보니 ‘집’과 ‘방’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사실 마을에는 작은 집합주택이 서너 채 있다. 처음에는 땅값도 싼데 왜 이렇게 작은 집을 지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알겠다. 시골에선 집과 방이 클 필요가 없다. (87쪽)
산촌에 와서 새삼스레 느끼게 된 것은 각종 만들기의 즐거움, 특히 음식 만들기의 즐거움이다. 맨 처음 시도한 것은 효소다. 봄에 올라온 쑥, 질경이, 찔레꽃, 오디 등으로 효소를 담갔다. 한여름 거침없이 나무를 휘감고 올라오는 환삼덩굴 처치 방법을 고민하다 고혈압, 당뇨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도 효소로 담가보았다. (92쪽)
사람들은 시골에 오면 문화생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시골에는 도시 방식의 문화생활이 없다. 그 대신 시골 방식의 문화생활이 있다. 도시의 문화생활이 남이 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라면, 시골의 문화생활은 내가 직접 하는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드는 뿌듯함이 있는 삶. 진정한 문화생활이란 그런 것이리라. 곶감 덕에 이번 연말연시에는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을 선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100쪽)
마을에 학교와 아이들이 없다면 어떨까? 여느 시골 마을처럼 죽어가는 마을일 것이다. 반대로, 학교에 마을이 없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삶과 동떨어진 것일 테고, 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이란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마을엔 학교가 필요하고 학교엔 마을이 필요하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