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여 연희전문 문과 중퇴했다. 1935년 소설 『소나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앙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문예지 <중앙>에 유일한 장편 소설 『생의 반려』를 연재 중 지병인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문학적 정열이 남달리 왕성했다.
저서로는 『금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따라지』 『산골나그네』 『두꺼비』 등 30여편이 있다.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 1928년 『조선지광』지에 단편소설 『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효석의 문학은 시적 서정을 소설의 세계로 승화함으로써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장면의 분위기를, 섬세한 디테일보다는 상징과 암시의 수법을 이용하는 그의 문체는 우리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돈』,『 메밀꽃 필 무렵』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性)의 탐색을 통해 그는 일제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하고, 순결한 세계를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性)과 결합시킨 시적 서정소설로 새로이 개척해냈다. 이로써,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당시 이태준, 박태원 등과 함께 대표적 작가로 주목받았던 이효석은 그러나 그의 황금 같은 문학적 결실을 다 누려보지도 못한 채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평양 상수리에서 출생. 1917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카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 무렵 본격적인 문학수업기가 시작된다. 1919년 주요한, 전영택, 긴환 등과 <창조>를 창간하고 『약한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이 시작된다. 특히 1921년 <창조>에 발표한 『배따라기』는 스스로 본격적인 단편소설로 꼽고 있는 작품이다. 1925년 <조선문단>에 자연주의 대표 단편소설인 『감자』를 발표하였다. 대표작품으로는 『마음이 옅은 자여』『소설작법』『뺏기운 대금업자』『박 첨지의 죽음』『광화사』 등에 이어 장편 『수양대군』『여인』과 단편 『잡초』『적막한 황혼』을 발표하였고, 『운현궁의 봄』『화중난무』가 있다. 그의 작품은 직선적이면서 탐미적 경향이 강하다.
호 춘원. 평북 정주 출생. 메이지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소년》지를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2 ·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마의태자><단종애사><흙>등의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보석된 후부터 친일 행각을 본격화했고 창씨개명도 하였다. 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 등의 단편과 『이차돈의 사』『사랑』『원효대사』『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