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제이미, 그리고 양은 한 팀이다. 삼인삼색의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만 우선은 돈, 그것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우리 팀이 결성된 애초의 계기는 경영대학원 1학년 가을 학기 때 금융론 교수인 하버드 메이너드 스미스의 특별강의 「소로스가 될 것인가, 메리웨더가 될 것인가」였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MIT의 정교수인 그는 주 1회 컬럼비아로 와서 헤지펀드의 이런저런 전략을 해설해주었다. 그저 해설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학내의 모의 트레이딩룸을 활용한 ‘드라이 딜’(실제로는 돈이 오가지 않는 모의거래)을 하는 시간도 수시로 가졌다. 그 해에 가장 인기를 끈 강의 중 하나였다.
“헤지펀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궁극의 리스크테이커라고 할 수 있지. 1980년대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일상화되자, 국경을 넘어 떠도는 자금이 자율적 움직임을 보이게 됐어. 이른바 과잉유동성인데, 이런 자금의 존재가 없었다면 현재의 헤지펀드는 생각할 수도 없지. 리스크에 민감한 자금을 제어함으로써 헤지펀드는 거대 규모의 부를 쌓아올렸어. 비판할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게 마련인 리스크를 오히려 불러일으킴으로써 자금의 본질인 유동성을 확보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갖고 있어.”
이것이 하버드 야심이 넘치는 경영대학원 1학년생들 앞에서 한 첫 얘기였다. --- pp.37~38
밤에는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하루에 5만 달러를 벌었다. 즉, 그날 나의 하루는 5만 달러의 가치가 있었다. 얼마나 단순하고 산뜻한 평가인가. 자신의 행위가 그 자리에서 결과로 이어져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이 과정은 틀림없이 마약과 같은 매력이 있다. 은행을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내일은 더욱 크게 포지션을 잡아야지. 한번에 50개, 5,000만 달러 규모의 거래라면 시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펀드의 규모로 봐도 적정 포지션이야. 그리고 리스크 분산의 의미로 달러-마르크화 거래도 하자.
단 하루 사이에 1,000만 달러 단위의 돈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 것 같은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1,000만 달러도 단순한 기호가 되었고, 전화로 “막대 10개”라고 태연히 외칠 정도가 됐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는다면 단 하나뿐이다. 설사 진다 해도 목숨을 빼앗길 일은 없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게임. 가상전쟁이라고나 할까.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내가 가진 능력을 완전히 발휘해야만 비로소 물리칠 수 있는 강적이다. 바로 그래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고, 거기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승리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잠에 떨어지기 전에 제이미가 방에서 디스토션을 걸어 기타를 치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돈 버는 게 뭐가 나빠!” --- pp.113~114
“겐지, 자네는 아시아 통화를 거래하면서 알아챘을 거야. 핫머니는 지구를 뛰어 돌아다니고 있어. 행선지의 경제를 윤택하게 하고, 거품을 발생시키고 난 뒤에 일제히 달아나지. 헤지펀드는 그런 움직임의 첨병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고….”
한 단락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의 시선은 나를 떠나 허공을 떠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 펀드의 특질을 넘어 돈이 가진 성질 특유의 현상이기도 해. 거친 비유지만 돈을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워. 그들은 늘 새로운 먹잇감을 찾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늘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고, 늘 증식하지 않으면 안 돼. 일단 멈춰 서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해. 돈은 신흥시장 같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으면 거기로 몰려 들어가 다양한 경로로 시장에서 유통되며 맹렬한 기세로 증식해. 그러다가 한계에 이르면 단숨에 그곳을 떠나 다음 먹잇감을 찾아 나서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버드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살짝 젖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억양이 없는, 중얼거리는 것 같은 말을 혼자서 계속했다.
(…중략…)
기호가 된 추상적인 돈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에 부유하는 돈은 우리 욕망의 합일까. 아니면 이 지구상의 모든 물건의 가치의 합일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소중히 여기지만 환금가치가 없는 것(가령 애정과 우정)까지 돈으로 재어져 소외되고 마는 것일까?”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낸 그가 이윽고 우리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눈에는 확실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 pp.284~286
“중앙은행 사람들의 돈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돈과는 전혀 달라. 자네들은 돈을 공급하고, 신용을 제공하지. 자네들은 지폐가 아직 지폐가 아닌 단순한 종이였던 상태를 알고 있고, 또 회수돼 절단된 후 아무 가치가 없게 돼버린 과거의 지폐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시중은행에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실체가 없는 돈이 환상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알고 있어. 외환?세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실수요 때문이든 투기 목적에서든, 여하튼 이윤이 개입된 목적을 갖고 시장에 달려드는 것과 달리, 자네들은 거액의 손실을 아까워하지도 않고 통화가치 방어를 위해 시장에 개입하잖나.”
“그건 손실이 아니야. 통화가치를 지키기 위한 비용이지. 아니, 비용도 아니야. 원래 통화가치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어서 손익 계산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본말전도지.”
“맞아, 바로 그래. 일반인은 외환시장 개입도 돈을 쓰는 것인 이상 손익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돈이란 원래 자네들이 만든 거잖아. 그 신용을 유지하는 것은 돈으로 잴 수 있는 손익을 넘어서는 차원임에 틀림없지.”
“그게 헤지펀드와 무슨 상관이지?”
“헤지펀드가 절대 이익의 추구 너머로 보는 게 뭘까 하는 거야. 자네 같은 중앙은행 사람들은 화폐경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바깥에서 돈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 돈을 이 세계에 공급해, 화폐 공급을 조절하지. 게다가 그것이 달러이니까 세계의 신용 창조를 주재하는 것과 같아. 자네들은 신과 같은 존재야. 하지만 그런 자네도 스스로 창출한 돈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로 하는 생활인의 한 사람이야. 즉, 절반만 화폐 세계의 밖으로 나가 있는 반쪽짜리 신인 거지.
그런데 헤지펀드 매니저도 시장원리를 추구한 결과 화폐 세계에서 튕겨져 나가는 때가 있어. 나나 조지처럼 성공한 사람만이 잠시 틈새로 보았던 세계지. 그게 문제야. 앨런, 잘 들어. 자신이 아무리 사치스러운 삶을 백 번 살더라도 다 쓸 수 없는 돈을 가졌을 때, 자네라면 어떻게 할 건가?”
“필요 이상의 돈을 추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
“하지만 인간은 돈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해. 이것은 민족을 불문하고 보편적인 현실 같아. 일상생활, 장래를 위한 준비 이상의 것을 우리는 요구해. 경제학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항상적인 인플레를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정하는 것은 그런 인간 본성이 이유인지도 몰라. 돈을 신봉하는 인간이 언젠가 진화해서 더 자유롭게 되는 꿈을 마르크스는 꾸었고, 돈을 배제한 폴 포트는 자신의 ‘낙원’을 킬링필드로 바꾸었어. 결국 인간에겐 돈이 필요한 거야. 가치를 재고, 가치를 창출하는 완전한 외부자로서 말이야. 그것이 환상인데도 여하튼 필요로 해. 그리고 그 환상은 나와 자네 같은 반쪽짜리 신에 의해 비로소 지탱되는 거지.”
그린스펀 의장은 그저 물끄러미 루이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 pp.468~469
이건 게임 같은 거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돈의 흐름에 그물을 던져 교묘하게 그걸 잡아 올린다. 누구나 꼬리를 뺄 만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그 리스크 이상의 수익을 손에 넣는다. 사람들 마음속에 사는 돈이라는 이름의 신을 욕망이 시키는 대로 증식시켜 누가 더 솜씨가 뛰어난지를 겨룬다. 헤지펀드의 운영은 그런 가상현실 게임 위에 성립한다.
그러나 그 끝까지 갔을 때는 끝없이 진정한 리얼리티가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돈이 아무것도 측정해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진정한 자신을 마주했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다시 한 번 엿보게 되면, 잴 수 없는 것이 자유라는 루이스의 말을 나는 확인할 수 있을까. 양이나 제이미가 없더라도, 평범한 인간으로서, 어쨌든 해보는 거다.
--- p.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