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인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붕괴하는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거의 모든 사고 영역에 걸쳐 주요한 혁신을 이뤄놓았다. 유럽 지성사에서 세기말 빈은 감히 어떤 다른 도시도 범접할 수 없는 크고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다. 전통의 해체와 재구성 속에서 ‘현대적 자아’를 추구했던 세기말 빈은 모더니티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서서 형상화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사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으로 이동시켜 ‘무無역사적인’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쇤베르크는 서구 음악의 전총인 위계적 조성 질서를 파괴하고 고정 조성을 와해시키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런가 하면 마흐는 서로 모순되는 가설들의 상호 보족성을 밝혔다. 오늘날 많은 이가 말하는 ‘통섭’은 바로 세기말 빈 지성문화의 공통분모였다. ---pp.53-54, 제1부 1장 「합의정치와 창조문화의 유전자?합스부르크 시대」
오스트리아는 1945년 제2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약 40년간 성공적인 정치 및 경제사회적 발전을 통해 오스트리아 고유의 체제모형을 형성했다.
필자는 그 모형의 주된 요소로 1) 중립화 통일, 2) 합의제 정치, 3) 사회적 파트너십, 4) 조정시장경제/사회적 시장경제, 5) 복지국가 건설, 6) 오스트리아 국민형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구성요소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상호 보완하면서 상승적으로 작용했다. 이 모델을 관통하는 가장 큰 흐름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유전자인 ‘합의와 상생’의 정신이다. 오스트리아 모델은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 안정적으로 정착하며 오늘의 강소국 오스트리아의 기반을 형성한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크라이스키 시대’(1970~1983)가 큰 구실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진입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국내외의 급격한 환경변화에 직면했다. 후기산업사회의 도래, 후기물질주의의 대두, 세계화와 유럽화, 인구사회론적 변화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모델은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결국 개개의 요소는 저마다 새로운 적응과 자기 변신을 강요받는다. ---pp.79-80, 제1부 3장 「오스트리아 모델의 형성과 재창조?제2공화국 시대」
여기서 오스트리아 중립화 통일 주역들의 정치적 면모를 재조명해보자. 우선 사회당 내의 대표적 아이콘인 레너, 쉐르프, 쾨르너 등은 제1공화국 당시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온건파들로, 좌우 간의 치열한 이념 갈등 속에서 당내 급진 세력들에게 소외되었던 정치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제2공화국 들어 오스트리아 통일과 제2공화국 건설의 초석이 되었고, 아울러 공산당의 야욕을 분쇄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제2공화국 최초 거국내각의 수상이자 국가조약 협상에서 외상을 맡아 통일에 크게 기여한 국민당의 휘글이나, 2차 내각의 수상으로서 국가조약 체결의 주역이었던 국민당의 라브 등 보수계 정치지도자들도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국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국권회복, 그리고 민주주의 건설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던 구경이 큰 정치가들이었다. 좌우의 온건 정치 엘리트들은 기존의 묵은 이념 갈등을 불식하고 주권회복과 새로운 국민형성의 기초를 세우는 데 손을 맞잡았던 것이다. ---p.165, 제2부 2장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 그리고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제2공화국이 수립되던 1945년 이후 오늘날(2013)까지 68년의 역사에서 두 번(1983~1986, 2000~2007)을 제외하면, 의회에서 한 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못하는 경우 언제나 대연정을 구성했다. 대연정이 실시된 연한은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오늘까지 60퍼센트에 해당하는 41년이라는 긴 기간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두 거대 정당이 대연정을 구성하는 일은 국가적 비상상황에서나 있는 일이고, 그것도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일종의 변칙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대연정은 정상적인 ‘정치 양식’으로 간주된다. 많은 이는 그 뿌리를 오스트리아의 합의적 정치문화에서 찾는다.
오스트리아 대연정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오스트리아 특유의 노·사·정 협의체제인 사회적 파트너십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연정이 오스트리아 합의민주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라면, 오스트리아의 네오 코포라티즘 체제인 사회적 파트너십은 경제·사회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연정과 사회적 파트너십은 오스트리아의 합의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이며, 양자는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동시성과 호혜성을 가지며 서로 상승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정치·경제의 기본 축은 바로 이들 ‘이중적 합의’체제라고 할 수 있다. ---pp.181-182, 제2부 3장 「합의제 정치와 대연정」
오스트리아의 사회적 파트너십 체제는 서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발달되고 안정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후 오스트리아의 경제성장과 완전고용, 정치적 안정과 사회평화, 그리고 복지국가 구축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협상 테이블로 옮겨 ‘계급투쟁을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논의한 합의제 정치가 오스트리아 발전을 견인한 정치적 축이라면, 사회적 파트너십은 사회·경제적 축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번영은 합의제 정치와 사회적 파트너십이라는 쌍두마차 내지 ‘이중적 합의체제’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pp.181-82, 제2부 4장 「사회적 파트너십?형성·위기·전망」
오스트리아의 경제체제는 1990년대 이후 민영화, 탈규제의 물결에 따라 자유시장경제의 방향으로 크게 선회했으나, 아직도 비시장적 규제가 우세한 조정시장경제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여전히 조정경제체제 유형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더불어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적절히 조합한 대표적 사회적 시장경제 유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 등 순수한 자유시장경제에 비해 보다 ‘인간화된 자본주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경제의 가장 고유한 특성은 나라 스스로 창안하고 또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생태사회적 시장경제’의 지향성이 아닐까 한다.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조화 및 상생을 겨냥하는 생태사회적 시장경제가 지속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일깨워준다. 또한 사회적 시장경제의 개념에 환경과 생태학이라는 제3의 요소로 보완하여, 개념의 완성도와 유용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융합과 재창조’라는 오스트리아 고유의 특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pp.289-290, 제2부 5장 「생태사회적 시장경제?‘지속 가능한 발전’의 모색」
오스트리아 복지국가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함께 유럽대륙형 내지 비스마르크형 보수주의 복지국가군에 속한다. 오스트리아 복지국가 과정을 살펴보면, 1950년대 이후 복지국가로서 확장을 거듭하여 1950~1970년대에 걸쳐 이른바 ‘복지국가 황금기’를 구가하며 그 기본 틀을 완성했다. 오스트리아가 복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정치사회적 조건을 따져보면, 전후 오스트리아 정치가 오랫동안 친親복지국가 정당인 사민당과 국민당의 합의체제에 의해 주도된 점, 사회적 파트너십의 적극적 지원, 그리고 제도적 비토 포인트가 결여된 연방헌법체계 등을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복지국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 후기산업사회의 도래 및 인구 노령화 등 갖가지 정치경제적 환경변화에 직면한다. 오스트리아는 이에 대응해 복지국가를 축소 지향으로 전환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가족생활 및 노동시장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신新사회위험들’에 맞서기 위한 체제개혁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주요 정당들과 경제단체들은 이념적 지향과 대폭적 변화보다는 합의 추구와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대내외적 변화에 적응하며 복지제도를 쇄신했다. 오늘의 오스트리아 복지국가는 기존의 비스마르크적 복지국가 유형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적지 않은 점에서 경로이탈의 측면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의 개혁 과정을 돌아볼 때, 정책개혁의 완급과 내용을 슬기롭게 조절하여 기존체제의 원형질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를 새로운 변화 요인과 융합, 재창조하는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pp.291-292, 제2부 6장 「사회투자형 복지국가를 향하여?도전과 개혁」
레너와 크라이스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보면 오스트리아의 20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두 사람은 이어달리기하듯 1910년부터 1990년까지 오스트리아 현대사의 주역으로, 언제나 주요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레너는 제1, 2공화국, 두 번에 걸쳐 수상(1918~1920, 1945)으로 재직하면서 국가형성의 산파역을 맡았고, 크라이스키는 1970년에서 1983년까지 장장 13년간 사회당 단독정부의 수상으로서 오스트리아의 현대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두 거인의 이러한 정치경력은 매우 희귀한 예다. 따져보면 레너는 두 차례에 걸친 오스트리아 건국의 아버지였고,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의 중흥기를 연 ‘제2건국’의 아버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유럽의 대표적 강소국 오스트리아의 오늘을 만든 국부國父로서 실로 오스트리아 역사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p.448, 제3부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