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해선 안 된다. 이것은 디스토피아에 대한 재현이 아니다. 디스토피아를 향한 무기력의 학습이다. 지금, 우리에 대한 상상력을 갉아먹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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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을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 구성된 가상의 세계 안에 마치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라도 있는 양 으스대거나 추켜세우는 것에 나는 호들갑보다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현재 K콘텐츠 혹은 K드라마 열풍에 대한 담론 상당수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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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자들처럼 누군가의 세상에 대한 기여도를 줄 세워 평가할 수 있는 올인원 스탯의 허구적 가능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협업의 기회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하지만 쉽게 집계되지 않는 그 수많은 능력들에 대해 존중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훨씬 이치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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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혐오와 여성혐오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의 세상이 충분히 평등했다는 전제 아래 페미니스트들이 던진 돌이 불필요한 파장을 일으켰다는 서사에 동의해야 한다. 즉 이미 김치녀, 김여사, 된장녀, 맘충 같은 차별적 어휘가 기본값이었던 세상에서 대항 언어로 한남이 등장한 걸 마치 평화롭던 세상에 남혐 단어가 뚝 떨어진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한다. 대체 이런 허접한 논리에 언제까지 반박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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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분류할 수 있는 힘이며, 분류하는 과정을 통해 순환적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다시, 무엇을 보고 웃을 것인가, 웃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은 다분히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이다. 웃자고 한 말의 무게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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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가학적 풍경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아닌, 이 가학적 풍경이 정당화되는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자신이 겪는 고통의 크기만으로 진심을 증명받을 수 있는 이 진정성 가득한 지옥에서 우리가 과연 살아갈 수 있는지, 그렇게 살아가도 되는지의 문제다. 진정성 있는 지옥이, 지옥이 아닌 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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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 코로나 이전의 세계가 우리가 회귀해야 할 어떤 ‘정상’ 세계라는 것을 뜻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회귀할 좋은 과거가 아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과 가능성이다.
--- p.228
어디 남들 하는 대로 안 하면서 잘되나 보자, 라고 백안시하는 수많은 의혹의 눈길 앞에서 그럼에도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을 때, 조금만 잘못해도 그럴 줄 알았다고 신나서 떠들 이들의 냉소 앞에서 그래도 한 발을 더 디뎌야 할 때, 모두의 의심 속에서 결국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를 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목소리만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헌신할 버팀목이 되어 준다. 보수화된 통념의 힘 앞에서 그럼에도 함께해주는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헌신이며, 오로지 그런 헌신만이 도래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준다. 세상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모든 노력은 그러한 헌신과 연대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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