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시각적 이미지들끼리 또는 서로 다른 청각적 이미지들끼리의 비밀스러운 조우를 시인들은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서 섬세한 감각의 서정적 세계가 탄생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잘생긴 거짓말 같은 이런 길이 생긴다. --- p.24 중에서
우리는 무작정 동심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것이 아니라 동심의 순수성과 그 꾸밈없는 거짓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망이 투사된 어떤 이상이나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분명 아이들의 현실을 넘어선, 혹은 어른들에게 감추고 싶은 마음들이 숨어 있다. 그것이 진심(眞心) 아닌가. 아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스스로의 현실을 넘어서거나 감추고 싶은 그 마음들이 진짜 동심은 아닌가. 그러니까 동심을 지배하는 것은 외연이 아니라 심연(深淵)이다. --- p.47 중에서
동시는 얼핏 어른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지면 위에 글자들이 쭈뼛쭈뼛 몽당연필처럼 말없이 박혀 있는 메마른 풍경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 글자들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동시는 하나의 우주로 변해 꿈틀거린다. --- p.64 중에서
정말 그렇다. 살아갈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 작가로서 아이들을 “몰랐던 이야기”라고 쓴다. 그냥 그대로 하나의 우주에 담긴 이야기라고 읽는다. 이 세계에서 끝까지 존중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몰랐던 이야기” 즉 아이들의 마음이다. ‘최초의 밤’을 열어보듯 아이들의 마음을 가만히 열어본다. 어른 작가로서 끝까지 아이들에게 지켜줘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고독’과 ‘유머’다. --- p.83 중에서
“난 어딨죠?” 이런 질문처럼 동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어른들이 동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그럴듯한 언어로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거나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우리 모두를 위해 쓰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다. 잃어버린 무엇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사랑의 모든 시간과 장소들인지 모른다. 그 시간과 장소들은 우리 안의 아이들과 함께 있다. 따라서 동시는 희망과 동시에 절망을, 꿈과 동시에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문학이 된다. --- p.97 중에서
아이들은 무지개 같은 존재다. 동시는 무지개 같은 이 아이들이 가진 몸과 마음을 탐색하고 나아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보다 깊은 눈으로 아이들의 고독을 살펴야 할 까닭이다. 아니, 아이들에게도 고독이 필요한 이유라고 먼저 말해야 한다. 이 세계를 나의 세계로 바꾸는 것이 문학이라면 더더욱 이 고독은 중요해진다. 어쩌면 고독은 음악처럼 듣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소리로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음악적 소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소리들은 어떤 것의 표현이 아니다. 소리들 자체가 어떤 것이다. 몸짓으로 하는 아기들의 언어처럼, 그것은 ‘나에게 내 인생을, 내 사랑을 정직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책’인지 모른다. --- p.101 중에서
봄이 눈부신 것은 꽃이 피기 때문인데, 꽃이 핀다는 것은 꽃나무 여린 가지마다 망울이 둥글게 맺혀 사상(事象)과 교신하고자 하는 찬란한 투쟁이겠지요. 이때 투쟁은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감내하는 것은 물론 자아의 내면과 벌이는 고투를 동반한 삶의 형식이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법의 순간’이 아닐까요. 시의 입장에서는 동심이 발화하는 지점이겠지요. --- p.133 중에서
시인의 몽상과 그 몽상의 동력으로 부리는 말과 어떤 이미지 속의 이 어린 시절은 우리의 어린 시절의 추억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으며 보다 더 멀리멀리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의 몽상은 어떤 모험담의 줄거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동화 작가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냥 불쑥, 사로잡은 사유의 덩어리들을 구름처럼 이동시킨다. 몽상이 꿈과 변별력을 가지는 지점 중의 하나다. --- p.153 중에서
동시는 이른바 동심에 다가가려는 노력, 이해하려는 노력, 사랑하려는 노력, 이 노력들로부터 온다. 이런 노력들은 하늘에서 오는 것처럼 편안하게 오지 않는다. 꽃이 올 때 겨울의 모진 칼바람 속에서 생살들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174 중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조금만 생각하고 읽도록 하면(누군가가 권하면) 어떤 비유나 꾸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서사를 따라간다. 실제 동시를 공부하려는 어른들보다 읽는 눈이 정확하고 주제를 신발처럼 꿰차 놀랄 때도 많다. 시인이 시에 숨겨놓은 느낌이나 분위기에 금방 녹아들며,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실감한다. 따라서 굳이 작품에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어른, 나아가 어른 작가인 우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p.177 중에서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우리가 쓰는 말처럼 언제나 다시금 존재하며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은 내 안에도, 내 밖에도 그리하여 모든 곳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들 속에 있고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아닌가. 해서, 동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은 어린 시절 잃어버린 비밀번호부터 찾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시는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제각기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 p.187 중에서
좋은 동시는 우리 안의 상처받은 아이,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슬픔으로 가득한 채 숨어 있는 내면의 아이를 사랑으로 일깨우는 거죠. 내면의 아이는 끝없이 다른 곳을 꿈꾸는 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직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미래의 나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존재’이자 ‘실존’이니까요. 내면의 아이가 어릴 때부터 겪는 불안, 근심, 고뇌의 언표로 놓인다면 그 아이를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동시가 가진 진정한 힘이 아닐는지요. --- p.225 중에서
동시는 어른 작가로서 돌이킬 수 없는 삶을 거울로 놓고 행하는 자기반성의 길고 깊은 여정이다. 시(동시)가 고백의 장르라면 그것은 미래의 것이다.
--- p.24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