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상상력이 중요
한자는 그림이다. 문자를 통한 최초의 의사 전달 방식은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림이었기 때문에 한자에는 미감이 담기게 되었고 미감을 표현하기 때문에 한자는 예술과 가까운 속성을 갖게 되었다. 서예와 전각은 한자를 쓰고 깎는 행위만으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자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영감과 예술적 상상력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聾(귀머거리 롱) 자는 용[龍]과 귀[耳]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왜 귀머거리를 표현하는데 용과 귀를 결합했을까. 아마도 청각 장애인에게 달려 있는 귀는 용의 귀이기 때문에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생각은 예술가의 상상력이다. 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소설이 있다. 동명의 영화로 더 유명하다. 스칼렛이라는 대농장주의 장녀가 남북전쟁을 거치며 가문의 몰락과 사랑과 인생의 영락을 경험하는 내용이다. 처음 이 영화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의 제목은 「난세가인(亂世佳人)」이었다. 난세를 겪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이니 영화의 내용과 딱 맞는 제목이다. 그런데 후에 「표(飄)」라는 제목이 다시 생겨났다. 이 소설과 영화의 표지는 한동안 「난세가인」과 「표」라는 두 제목이 모두 유통되었다. 표(飄)는 ‘회오리바람 표’ 자로 ‘바람에 나부끼다, 펄럭이다’라는 뜻이 있고 ‘바람에 떨어지다, 유랑하다’라는 뜻도 있다. “미풍이 규방 창문에 부딪히니, 비단 커튼이 홀로 펄럭입니다(微風沖閨?, 羅?自飄揚. 미풍충규달 나유자표양).”라는 시구도 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전쟁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려가는 가녀린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인데 「표(飄)」는 이런 내용을 이미지로 전달했다. 영화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난세가인」이지만 「표(飄)」라는 제목은 한없이 바람에 떠가는 여주인공의 가련한 인생을 연상하게 했을 것이다. 후에 이 영화는 「표(飄)」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것이 한자가 갖는 이미지로서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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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전등록』은 북송 경덕(景德) 원년인 1004년 승려 도원(道原)이 선종의 역사를 쓴 책이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등불로 자주 비유한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 때문이다. 제목의 전등(傳燈)은 ‘등불을 전한다’라는 뜻으로 불법의 전수를 비유한다. 그래서 이 책은 불교의 1,701명 선사들이 제자에게 법통을 전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도의 달마가 동쪽으로 와 양 무제를 만났지만 양 무제는 달마의 높은 경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에 가서 9년간 면벽수도를 했다. 혜가(487~593)는 출가하기 전에 유학과 노장 사상에 조예가 깊었는데 마흔 살의 나이에 소림사에 들어가 수도에 정진했다. 어느 겨울 큰 눈이 내려 허리까지 쌓인 날, 혜가는 자신의 수행이 보잘것없음을 한탄하며 눈물로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달마는 과거 제불(諸佛)들의 수행이 혹독하고 지난했음을 말하며 작은 지혜와 덕으로 참된 깨우침을 얻을 수는 없다고 일깨웠다. 혜가는 이 말을 듣고 팔을 잘라 불법을 구한 것이다. 이 일화를 단비구도(斷臂求道)라고 한다. 달마는 혜가의 의지가 역대 제불처럼 자신의 신체도 아까워하지 않는 정도라 생각되어 혜가라는 법명을 하사하고 후계자로 삼았다. 달마와 혜가가 가르침을 주고받은 일화로는 안심(安心) 문답이 유명하다. 혜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달마가 답했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라.” 혜가가 한참 후 말했다. “마음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달마가 답했다. “너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편안과 불안은 모두 마음의 작용일 뿐, 실체가 아닌 허망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달마는 중국 선종의 1대 조사이고 혜가는 2대 조사가 되었다. 지금도 소림사에서는 승려들이 한 손으로 합장하는데 이는 혜가를 기념하는 행위이다. 달마가 면벽수도한 동굴인 달마동(達摩洞)이 아직 있고 경내에는 혜가가 단비구도를 했다는 입설정(立雪亭)이 있다.
중국 선종은 6대 조사인 혜능(慧能)이 법통을 전수받으며 큰 전환점을 맞는다. 소림사 내의 강력한 세력이던 신수 일파가 혜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혜능과 신수는 구법에 대한 생각이 돈오(頓悟, 한순간의 깨달음)와 점수(漸修, 점진적 수양)로 달랐다. 신수 일파는 독자적으로 소림사의 법맥을 이어가고 혜능은 신수 일파의 추격을 피해 남방인 광동성 조계(曹溪)까지 내려간다. 이 사건은 선종 사상이 중국 전역에 전파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혜능은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진면목(眞面目, 진면목은 선도 악도 아니다), 풍번문답(風幡問答, 흔들리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다)과 같은 유명한 선문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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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였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 있다가 초(楚)나라의 초빙을받았다.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면 자기들에게 해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공자 일행을 위협하고 길을 막았다. 공자와 제자들은 7일 동안 화식(火食)을 하지 못했고 굶주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진채지액(陳蔡之厄)’이라고 하는데 『논어』 외에도『순자』, 『공자가어(孔子家語)』, 『장자』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논어』에는 이때 자로가 “군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군자는 진실로 곤궁할 때가 있으니, 소인은 곤궁하면 지나친 행동을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본문의 내용은 『순자』에 실린 내용이다. 자로가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보답하고,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늘이 화로 보답한다(爲善者天報之以福, 爲不善者天報之以禍. 위선자천보지이복 위불선자천보지이화).”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명심보감』의 첫 구절로 유명한 말이다. 하늘은 왜 큰 덕망과 학문을 가진 선생님에게 이런 가혹한 고난을 내리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자로는 과격하고 직선적인 사람이다. 이 말은 천도와 운명에 대한 자로의 분노에서 나왔다. 진실한 원망이다. 공자가 답했다. 깊은 숲속의 향초들이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마음으로 향기를 뿜는 것이냐고. 아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홀로 향기를 뿜는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신념에 대한 비유다. 『논어』의 첫 단락에서도 “남들이 나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재능의 유무는 그 사람에게 달린 문제지만 좋은 운명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시운에 따른 것이다. 지혜롭다고 반드시 등용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충성스럽다고 반드시 신임을 받는 것도 아니다. 능력 있는 자가 버려진 사례는 무수히 많다. 공자는 운명이 인간의 의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 말했다. 다만 군자는 널리 공부하고 깊이 사색하면서 자신의품성과 능력을 키워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운명의 영역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할 수 있는 일에 힘쓸 뿐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치학,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사회에서 발현되어야 하는 분야이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줄 군주를 찾아 60대의 나이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천하를 주유했다. 수많은 거절을 당했고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 지기불가이위지자)”이라거나 “집 잃은 개(喪家之狗, ‘상갓집 개’라고도 해석한다.)”라는 등의 조롱과 멸시도 받았다. 본문의 말 속에는 인생이 막혀[窮 궁] 근심하는[憂 우] 인간 공자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괴로워하지 않고[不困 불곤] 뜻이 쇠약해지지 않는[意不衰 의불쇠] 성인 공자의 신념도 느껴진다.
『장자』에 기록된 당시 공자의 심경은 다음과 같다.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도에 궁하지 않아야 하고 고난에 임해도 덕을 잃지 않아야 한다. 큰 추위가 닥쳐 서리와 눈이 내리면 그때서야 우리는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여전히 무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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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당나라 때의 소설 「정혼점(定婚店)」의 일부이다. 당 태종 때 위고라는 사람이 혼기를 놓쳐 고민이 많았다. 어느 날 새벽, 송성(宋城) 용흥사 계단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달빛에 책을 뒤적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위고가 무슨 책인지 물었더니 노인이 말했다. “이 책은 저승의 책일세. 이 주머니 속의 붉은 실로 남녀의 다리를 묶으면 나중에 결혼할 인연이 되는 걸세.” 이 노인은 혼인을 주관하는 신선이었다. 위고는 자신도 결혼할 상대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위고를 시장으로 데려갔다. 한쪽 눈이 먼 노파가 아기를 안고 채소를 팔고 있었다. 행색이 몹시 남루했다. 노인은 저 아기가 위고의 짝이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위고는 하인을 시켜 아기를 죽이라고 했다. 당시 기대하던 혼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은 암살에 실패하여 아기의 양미간에 상처만 내고 달아났다. 위고가 기대했던 혼담도 깨졌다. 14년 후, 위고는 다른 지역에서 벼슬을 하다가 자사(刺史)인 왕태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결혼했다. 나이는 16~17세 즈음이었고 아름다웠다. 다만 늘 양미간에 꽃 장식을 붙이고 있었다. 어느 날 위고가 그 사연을 물어보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는 자사의 딸이 아니라 조카입니다. 부친께서 송성의 현령이었는데 집안이 몰락하여 유모가 저를 키웠습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시장에서 찔러 상처가 남은 것입니다. 장성하여 숙부를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위고는 혹시 유모가 애꾸였는지 물었더니 아내가 놀라 그렇다고 답했다. 위고는 지난날의 일을 모두 말했고 이후 두 사람은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해졌다. 남녀의 인연이 운명처럼 내정되어 있다는 관념이 반영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유전되면서 중매인(中媒人)을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연이 될 남녀의 다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묶여 있다는 상상이 흥미롭다. 중매인을 월하빙인(月下氷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이야기는 『진서(晉書)』에서 나왔다. 어느 날 영호책이라는 사람이 얼음 위에 서서 얼음 아래의 사람과 얘기하는 꿈을 꾸었다. 색담이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해몽했다. 얼음 위는 양(陽)이고 얼음 아래는 음(陰)인데 얘기를 나누었으니 음양의 만남이므로 혼인을 중재하는 꿈이라는 것이다. 얼마 후 과연 영호책에게 중매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양가에서 흔쾌히 동의했기에 혼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월하빙인은 이 이야기의 빙상인(氷上人, 얼음 위의 사람)과 월하노인이 합쳐진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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