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 및 채집 부족의 세계에서는 모든 먹음이 마치 인간을 먹는 것과 유사했음을, 왜냐하면 동물 그 자체야말로 삶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동물은 인간에게 삶의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주요 의례는 그렇게 먹히는 동물을 향한 사의며 감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동물을 죽이는 과정에서, 먹는 과정에서, 즐기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자연의 방식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입니다.
---「제1장 모험으로의 부름」중에서
말하자면 무려 9세기에 일찌감치 인도인은 그 모든 신들이 결국 심리학적 힘의 투사라는 사실을, 따라서 신들은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2장 시험의 길」중에서
저는 개인이 꿈 의식의 층위 쪽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의례의 주된 기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꿈 의식의 층위는 곧 생산의 층위이고, 우파니샤드 가운데 하나에서 해석되는 것처럼 ‘옴aum’의 두 번째 층위 영역입니다. 꿈 의식은 더 안쪽에있는데, 이것은 창조적인 의식인 반면, 각성된 의식은 곧 비판적 의식입니다.
---「제3장 선견의 탐색」중에서
저는 주위에서 발견되는 낭만적 사랑이 결국 이러한 이상, 즉 ‘아니마anima’라는 사실을 실제로 발견했습니다. ‘아니마’는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에 갖고 있는 이상입니다. 우리는 바깥에 있는 다른 실체에게 그것을 투사하고, 결국 그것과 합쳐지게 됩니다. 머지않아 우 리는 그 투사를 꿰뚫어 보게 되지요. 그러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제4장 여신과의 만남」중에서
제가 자라난 바탕이었던 가톨릭이라는 종교와 관련해서 제 삶에서 일어난 일이 딱 그거였습니다. 가톨릭의 모든 묵상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다른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결국 내게도 일어나야 마땅한 뭔가의 은유로서(즉, 나 역시 죽었다가 부활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내 자아는 죽고 내 신성은 부활해야 한다고) 읽지 못하는 한, 그 내용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제5장 혜택」중에서
괴테의 『파우스트』 끝부분에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현상적인, 또는 일시적인 것은 모두 단지 지시체에,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니체는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모두 단지 지시체에, 단지 은유에 불과하다.” 이제 신화의 기능은 우리가 일시적인 모든 것을 지시체로 경험하게 돕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른바 영원한 진리조차도 단지 지시체로 경험하게 돕는 것입니다. 신화는 세계를 열어 주며, 그리하여 신화는 언어 너머에, 말 너머에 있는 뭔가가 드러나게끔 투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 뭔가란 바로 우리가 초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6장 마법의 도주」중에서
신화가 하는 일이란, 칼프리트 그라프 뒤르카임이 초월이라고 부른 것을 향해서 인간을 열어 주는 동시에, 자연 환경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신화의 의미는 우리 모두가 신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신화의 현현이라는 것입니다. 자연계이건 인간계이건 마찬가지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요.
---「제7장 귀환의 문턱」중에서
신화가 삶에 통합되는 방식은 곧 의례라는 방식입니다. 반드시 의례화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당시의 삶에 본질적이게 마련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대 세계에서 신화적 사고를 ‘행동’으로 가져오려고 시도한다면, 지금 하는 일과 삶의 피상성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 하는 일과 삶의 본질의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삶의 본질은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의 동굴 이후로 줄곧 똑같았습니다. 즉 먹는 것, 번식하는 것, 어렸다가, 성숙했다가, 늙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일들이 개인적으로 주도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내면에서 생물학적으로 현존하는 세계의 작용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지적 주도자라고 느꼈을 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제8장 두 세계의 주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