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스티븐 H. 마일스와 그의 저서 Oath Betrayed를 만난 것은 2006년 여름이었다. 미국 보스턴 시에 있는 하버드 대학에서 “건강과 인권(Health & Human Rights)”이라는 주제로 5일간의 집중교육프로그램이 개최되었다. 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강연자들과 전 세계 30개국에서 온 약 150명의 건강권 관련 인권활동가들의 국가 이슈와 국제적 이슈에 대한 토론으로 매 시간 열기가 대단했다. 마지막 날 초청 강연자가 스티븐 H. 마일스 교수였다. 차분하고 다소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인권침해에 대해 미 정부와 미국의사단체의 책임을 통렬히 고발하고 있었다. 미국인 의사인 그는 테러와의 전쟁 중에 있는 조국인 미국과 동료 의사들과 미국의사협회의 능동적?수동적 인권 위반사항을 30개 국의 외국인들 앞에서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었다. 미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분명 내부 고발자였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비판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집합적 문화에서 내가 성장한 탓일까? 부모, 스승, 직장상사, 종교지도자, 국가와 같은 권위나 권력을 가진 윗사람에 대한 비판은 공동체의 단결을 해친다는 이유로 쉽게 허용되지 않는 집합적 문화 말이다. 우선 스티븐 H. 마일스의 그 용기가 부러웠고 이를 수용하는 미국 사회의 의식이 새삼 생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잔학행위가 드러나면서 국제사회는 인종말살을 금지하고 고문이나 학대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제정하였다. 고문의 긴 역사에서 특히 의사들은 고문피해자가 고문 중 사망하지 않도록 감독했고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은폐하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 반대자를 정신병 환자로 진단하여 유폐했고 건강에 유해한 인체실험을 수행하기도 했다. 나치정권 하의 의사들과 소련, 칠레, 터키, 아르헨티나로 대표되는 억압적 정권의 의사들이 그랬고 전쟁 중의 일본 의사들이 그랬다. 과거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의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문헌과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 군대의 의사들은 최근까지 가혹한 심문에 의학적 조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한 의사들을 “위험에 처한 의사들” (Doctors at Risk)라고 부른다. 나치정권과 같은 억압적 사회나 테러와의 전쟁에서만 의사들이 위험에 처해졌을까? 교도소와 같은 구금시설의 의사들, 군대에 소속된 군의무관들, 폐쇄병동에서 일하는 정신과의사들도 환자의 건강과 조직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위험에 처한 의사들이다. 어디 그뿐이랴. 권위적인 의사?환자의 관계, 과다한 처방, 검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계화된 진료, 이윤추구가 목표가 된 상업화된 의료,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등 이 모든 것들이 의료현장에서 의료인들을 매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유엔과 세계의사회(WMA),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와 같은 국제단체들은 의료인에 대한 이와 같은 도전에 성명을 발표하고 의료인들을 위한 지침서를 제공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오늘 날에도 “나는 나의 판단, 능력과 일치하여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의술을 사용할 것이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해악으로부터 환자들을 지키겠노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 의료는 국가의 이익이나 의료인의 자기보호 또는 재정적 이익보다 환자의 건강을 늘 상위에 두는 높은 수준의 윤리가 요구되는 직분이 아닐까?
의료인의 돌봄이 필요한 환자들의 고통은 개인의 신체, 정신적인 원인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가 속한 사회의 관행, 편견, 제도들이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되어왔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우리 의료인들이 환자의 건강에 위해한 국가적 사회적 관행들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행동해 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수많은 가정폭력, 성폭력의 현실에 의료인들이 얼마나 우려를 표하고 피해자들의 치유와 방지를 위해 노력해 왔을까? 고문피해자들의 치유받지 못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후유증과 고통들이 의학회에서 이슈가 된 적이 있을까? 얼마나 많은 의료인들과 의사단체들이 새터민들, 불법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들의 신체적 정신적 외상에 대해 그들 고통의 부당함을 폭로해 왔던가? 스티브 H. 마일스의 고발을 통하여 대부분의 의료인들이 그동안 책무라고 느끼지 않아 왔던 건강관련 인권침해 현장 등을 재인식할 수 있었으면 한다. “불의와 해악으로부터 환자들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일상의 의료현장에서 무시되거나 배반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스티븐 H. 마일스는 그의 저서에서 미 부시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으로부터 펜타곤의 고위관리와 포로수용소 의료인들에 이르는 모든 계층의 포로학대에 대한 조직적 가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군 정책이나 미국이 시작한 전쟁을 고발하는 데 중점을 두지는 않았다. 오랜 동안 앞장서서 국제인권을 보호해왔던 미국이 스스로 그 중요한 역할을 포기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미군 의료요원들이 그들의 책무를 저버리고 포로학대에 개입함으로써 의료윤리를 배반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내내 나는 의료라는 직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전문인으로서 의료인은 부당하거나 위험한 의료 정책과 사회 내 관행, 편견들로부터 환자들을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책무가 있다.
의료인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정말 중요하다.
---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