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며 무엇을 했다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라이프스토리를 감히 쓸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 사람은 신학생 시절에 한 사람은 수녀 시절에 운명처럼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나누었던 아픈 사랑 이야기를 쓸 것인가, 도시빈민선교를 한답시고 서울의 뒷골목 청량리 588에 들어앉은 '기구한'섭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사랑에는 가난이 없기에 사랑의 샘물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섬김'과 '나눔'의 다일공동체 샘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생선 야채 썩는 냄새가 뒤범벅된 시장 한가운데 앉아 행려자들의 밥 시중을 들며 소리쳐 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섬김의 세월이 흘러 나는 다시 이렇게 외칩니다. '아,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정말 좋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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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함께 좋아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믿고 살아왔어요. 내 느낌과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를지라도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의 종교, 당신의 문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 당신의 음식, 당신의 냄새, 당신이 지닌 모든 것, 당신을 지탱해온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모두 다 사랑할 수 있다구요. 하지만 오늘을 통해 더욱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본래 사랑이 있었어요. 그 사랑으로 이제 당신을 새롭게 보는 기쁨이 제 안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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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4일 토요일 오후 1시, 먹물빛 수녀복 대신 하얀 웨딩드레스에 앙증스럽게 예쁜, 흰 망사 모자를 쓴 그녀가 새문안 교회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모자 뒤로 하늘하늘한 망사 너울이 신비감을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짙은 곤색 양복에 하얀 실크 넥타이를 빌려 매고 윗주머니에 흰 신비디움 꽃을 꽂은 내가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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