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정말 머리 깎을 생각은 어떻게 했어? 축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상민은 전부터 묻고 싶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냥 화가 났어. 예쁜 여자애가 될 수도 없고, 축구도 맘대로 할 수 없고, 공부도 잘 못하고. 나는 그렇다고 쳐. 언니는 할 수 있는 게 있었는데 아빠가 할 수 없게 하잖아. 그래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뭘까. 여자라고 하지 말라는 거 해버리기로 결심했어. 좀 쎈 걸로.” ---「빡빡머리 앤」중에서
“제발, 그 ‘어디니?’ 좀 안 하면 안 돼?”
기숙사로 들어가고 얼마 안 돼 주연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 어디니? 라는 말 좀 때려치우라고 했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나는 언니를 관리했던 어머니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언니를 대했던 내 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으로 내 딸을 관리했다. 무엇이 무서워서, 무엇이 두려워서.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자책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게 언니를 더 숨 막히게 했을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대물림되어 나에게서 주연에게로 이어졌다. ---「언니가 죽었다」중에서
아빠의 파예할리는 어찌 보면 포기였다, 체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흉내를 내고 있다. 이래서 욕하면서,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파예할리는 새로운 길에 대한 결심이다, 라고 애써 자위한다. 나의 파예할리는 도전이고, 떨림이다. 가가린의 파예할리도 처음엔 두려움에 따른 체념이었겠지. 새로운 길은 언제나 두려움과 함께 한다. ---「파예할리(그래 가자)」중에서
“어머니나 저나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말이에요, 그깟 손 한 번 잡힌 거 별거 아니라고 여겨도 말이에요. 현진이는 아닐 수 있잖아요. 똑같이 덜 익은 고기를 먹어도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고 또 누구는 배탈이 나요. 다른 누군가는 그거 때문에 병을 얻어 목숨을 잃기도 하고요. 같은 음식도 누군가에게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는 독이 되기도 하고요. 같은 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분장」중에서
“엄마……. 미안해.”
나는 그 말을 내뱉으며 방으로 들어와 어두운 방 안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웅크려 울었다. 엄마가 나한테 거는 기대는 어려서부터 알았다. 그래서 엄마가 시키는 거라면 하기 싫은 것도, 먹기 싫은 것도, 가기 싫은 곳도 무조건 따랐다. 엄마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는 내가 ‘어떤’ 나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냥 엄마가 원하는 사람이 되면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 되는 줄 알았다. 엄마와 할머니의 불편한 관계를 눈치 챘고 그래서 착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남자아이처럼 의젓한 아이가 되어야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도 편해진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꾸역꾸역 참으며 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런 것들이 쌓여 잔뜩 흔들어 놓은 탄산음료 캔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마카롱 굽는 시간」중에서
나는 한동안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차들이, 수많은 바람이 지나쳤다. 아빠하고 함께했던 시간도 그만큼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가 있구나!’
나는 그렇게 헛웃음만 연달아 터트렸다. 울고 싶어도 그런 웃음만 나왔다.
‘아니, 이게 가능한 일이야? 아빠가, 우리 아빠가……. 악마가 아빠한테 왔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떠오르자 한숨만 터져 나왔다. 이제 그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지?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다 처박았다.
---「넌 괜찮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