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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파토스와 순정남
호텔 파토스와 순정남
중고도서

호텔 파토스와 순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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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80쪽 | 128*188*30mm
ISBN13 9788926762141
ISBN10 8926762149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많이 있으나, 손상 없는 상품
  •  판매자 :   코믹갤러리   평점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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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털털.
쿵!
연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노후한 분홍색 경승용차가 사거리에서 갑작스레 멈춰 섰다. 뒤따라 달리던 번쩍번쩍한 외제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가속도에 못 이겨 추돌을 피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퍼질 듯 털털거리며 달리는 낡은 경승용차를 확 앞질러 버렸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양보 운전 정신이 결국 이 사달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난데없는 사고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재준은 손목을 들어 남은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죄송합니다!”
분홍색 경승용차에서 내린 여자가 즉각 사과를 해 왔다. 버럭 소리부터 내지를 요량으로 씩씩거리던 재준은 누그러진 표정을 하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하나로 묶은 검은 생머리, 뽀얀 피부에 어울리는 지극히 동양적인 마스크, 거기다 몸에 착 붙는 스커트 차림의 여자는 언뜻 도도해 보이면서도 꽤 단아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행색이나 분위기로 보아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릴 사람은 아닌 듯하니, 차분한 대화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듯해 재준은 일단 안심했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다행히도 그의 안색을 살피던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없어요. 피차 보험 처리하죠, 뭐.”
재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여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보험회사는 부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립니까?”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 차 수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수리요? 알아서?”
“네. 제 차에 문제가 있어서 사고가 난 것이기도 하니까 수리비까지 부담드릴 순 없죠. 게다가 차가 오래돼서 굳이 수리할 마음도 없고요. 그러니 보상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보상?”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재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쪽이 추돌한 거니까요.”
“추돌? 내가?”
“네.”
“그래서 보상을 내가 해야 한다?”
“네.”
여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어이가 없어진 재준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너무도 차분한 표정으로 응수하는 여자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내가 추돌한 건 맞지만 그쪽 과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언제 퍼질지도 모르는 고물차를 도로로 끌고 나온 것 자체가 사고의 원인 아닙니까? 근데 무슨 보상이야?”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았으니까요.”
“신호가 떨어졌잖아요. 길 가려는 사람 갑자기 막아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무슨 안전거립니까? 아가씨, 혹시 수리비 많이 청구될까 봐 이러는 거예요?”
“아뇨. 오해하지 마세요. 보험 처리를 하신다기에 미리 알아두셨으면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름대로 편의를 봐 드리려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시다시피 일반 시내 도로는 최저 속도 제한이 없는 구역입니다. 물론 제가 고의적으로 사고를 낸 건 아니지만, 앞차가 부득이하게 급정거해서 후미 추돌 사고가 나면 뒤 차주분에게 백 퍼센트 과실이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쌍방에 보험회사를 불러 봐야 그쪽 분에게 오히려 타격이 있을 듯해서요. 그리고 저기…….”
여자가 손을 들어 분홍 차량의 뒷유리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재준의 눈에 뒷유리창에 대문짝만 하게 부착된 주의 문구가 들어왔다.

추돌 주의. 안전거리 유지 필수!

작은 차창에다 큼지막하게 써 놓은 저 빨간색 글씨를 왜 미처 읽지 못했던 걸까.
허탈한 한숨을 내뱉은 재준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백 프로 내 과실이니 내가 보상을 해야 한다?”
“네. 여긴 최저 속도 제한이 없는 도로니까요. 언제 어디서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내 도로이기도 하고요. 보상은 받지 않겠습니다. 경찰 불러서 사고 신고까지 하면 벌금에 벌점까지 추가되는데다, 사고 경위를 조사하느라 시간이 너무 허비…….”
오목조목 조리 있는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준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자신이 추돌한 분홍색 차량과 여자를 신기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도 잘하지. 그런데 이렇게 똑똑한 여자가 타는 자동차는 왜 저 모양인 걸까? 엔진에서 털털털 영감님 소리가 나는 구식에다, 촌스러운 꽃분홍색으로 도색한 낡은 경승용차라니.
대로변에 보기 좋게 퍼져 있는 저 작은 자동차와 눈앞에 서 있는 이 여자는 아무리 봐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이라고 재준은 생각했다.
갑작스레 당한 사고에 은근히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여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재준은 이 상황을 시원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알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걸로 하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연락처는 받아 두세요.”
뒤끝이 개운한 웃음을 지은 재준이 여자에게 선뜻 명함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받아 둬요. 다음 날 아픈 게 교통사고라던데. 혹시 아픈 데 있으면 연락 주시고.”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해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자, 어서요.”
여자가 마지못해 명함을 받아 들었지만 굳이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는 그에게 후유증을 들먹이며 연락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듯해 보였다.
사고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는지, 여자가 손을 들어 힐끗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덩달아 시간을 확인한 재준이 슬며시 인상을 찡그렸다. 당장 집에 들렀다가 유나를 챙긴 뒤, 약속 장소까지 나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조급해진 그의 표정을 헤아렸는지 여자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바쁘실 테니 그럼 이만.”
“잠깐만.”
재준이 돌아서 가는 여자를 붙잡았다.
“그쪽도 내놔요, 명함.”
“왜…… 요?”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쪽이 내 명함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사고 후유증 때문에 신경 쓰이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가 않아서 그래요. 일단 줘 봐요.”
망설이던 여자가 마지못한 얼굴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재준이 그녀의 손에서 명함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검은색 바탕에 은은한 펄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명함 앞면에는 그녀가 재직 중일 것으로 추측되는 회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M&A심포지엄?”
명함을 확인한 재준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되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요.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재준이 명함 뒷면에 쓰인 여자의 이름을 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분홍색 차에 올라탔다.
“차인하 팀장……. 차인하?”
마침내 명함 뒷면에 새겨진 여자의 이름을 확인한 재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여자가 탄 분홍색 경승용차가 털털거리는 영감님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흘렸다.
“저기, 잠깐만!”
재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낡은 엔진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 때문에 그녀는 재준의 목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를 붙잡을 새도 없이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분홍색 자동차를 바라보며 재준은 허탈한 한숨을 푸욱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차인하 팀장…….”
여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중얼거리는 재준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며 나왔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가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묘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문득 혼자만의 옛 기억을 떠올리던 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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