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틀렸다.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이란 자신을 살피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결국 실천적인 삶에 투신하지 않는 인생이다. 데카르트 역시 틀렸다. “Cogito ergo sum”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그건 넌센스다. “Amo ergo sum”이 맞는 말이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사도 바울이 무의식적으로 남을 감동시키는 힘을 가지고 말했듯이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옳은 말이다. 나도 사랑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살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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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힘에 의해서 파악되는 게 신앙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끝없이 통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한하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앙이 깊어지면 하나님은 힘을 행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을 펼치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성탄절에 예수님이 우리처럼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역시 신앙의 힘으로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새 힘을 주시며, 권력을 가진 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힘을 똑똑하게 보게 된다. 곱사등이로 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가 성자가 되어 내려온 것과, 바리새파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손도끼를 막 휘둘러대던 사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 역시,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과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자비가 흐르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것도 신앙의 힘이다.
--- p.24-25
교리와 신조를 신성시하는 종교는 저급한 종교다. 종교적인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교리와 신조이긴 하지만, 그것은 다만 길잡이 정도일 뿐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유일하게 영원불변한 지침이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끊임없이 부추겨 왔던 교리가 여전히 지금도 여성을 억압하고, 동성애자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사랑은 하나되게 할 뿐이지만, 교리는 분열시킬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은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전통을 회복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통으로부터 회복되기도 해야만 한다.
--- p.27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모두 좋고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그리스도는, 여우가 포도밭을 망치는 것처럼, 우리 삶의 영적 근거를 갉아먹는 것도 보통 시시하게 괴롭히는 작은 염려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결국, 성경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이 그들의 영원한 장자권(長子權)과 축복을 박탈당한 까닭도 역시 은 삼십 냥과, 새로 산 황소 다섯 마리, 한 시간의 피로 끝에 놓인 팥죽 한 그릇이 아니었던가. 우리도 바로 그따위 것들에 유혹 받고 있지 않는가?
--- p.30-31
심리적인 고통 중에 가장 최악의 형태의 고통은 죄로 인한 죄책감이다. 여러분 중에는 자신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끔찍한 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용서받을 수 없는”이라는 단어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것보다 덜한 것은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종류라도 흉터는 이제는 나았다는 표시다. 흉터란 흔적 없이 아문 상처가 아니다. 비록 흔적은 남아 있더라도 어쨌든 다 나은 상처가 흉터이다. 우리들의 “상처받은 치유자”인 예수님, 그분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는 모든 흉터의 조직들을 생각해 보자.
--- p.37
동성애자들을 향한 적대감은 애당초 성경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일부 기독교인들을 부추겨 사도 바울의 몇 문장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게 만들었고, 또 이미 다 폐기해버린 구약의 율법조항을 지금까지도 가슴에 껴안고 살게 만든 것이다. 노예제도를 철폐하고 여성들에게도 목사안수를 줌으로써 우리는 성경문자주의를 극복해냈다. 이제는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도 성경문자주의를 극복할 때다. 난관이 되는 건 동성애를 비난하는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동성애자들과 어떻게 화해를 할 것인지에 있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들을 거부하고 단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화해할 것인지에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 둘 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이 “자연스러운가” 하는 말만 되풀이 할 게 아니라, 대신에 뭐가 “정상적인가,” 그 정상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기독교인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점은 예수의 사랑이다. 사람들이 존귀한 예수의 사랑을 받들어 한결같은 부드러움으로 서로를 돌본다면, 그들의 성적인 취향이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진정한 관계는 외양이 아닌 내면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닌가? 서로의 삶을 북돋아주는 든든한 사랑을 도대체 언제부터 법적으로 혼인한 이성애자들이 독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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