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향 마을에 한 어른이 있었다. 놉을 얻어 일을 할 때 그 어른은 자기는 두 고랑을 잡고 일꾼들에게는 한 고랑씩을 맡겼다. 주인은 아무래도 자기 일이라 열심이고 놉은 대충대충 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어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알고 있었다. 제몸을 아껴 설렁설렁 일을 하면서도 주인이 너무 앞서나가면 놉의 마음의 편치 않다는 것을. 그래 그분은 비록 조삼모사일지언정 자기는 두 고랑을 잡아 놉들과 속도는 비슷하게 맞춰주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놉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제 일 다음으로는 그 댁 일에 발벗고 나섰다.
언젠가부터 소설 쓰는 일에 너그러워진 것 같다. 지면에 실린 내 소설을 보고 낯 화끈거리는 일도 줄었다. 못 쓰면 좀 어떠랴 싶기도 하다. 부끄러운 두번째 소설집을 내면서도 처음처럼 낯이 뜨겁지는 않다. 뜨겁기는커녕 뻔뻔하게도 딴에는 제법 안간힘을 쓰며 버텨온 나의 중년을 위해 소주라도 한잔 건배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려서는 하늘만 우러렀으나 나이드니 발밑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남은 물론이거니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나의 실수, 나의 못남조차 애처롭다. 사람이란 기대어 사는 것이라고 스무살이나 어린 제자가 알려주었다. 모두 다 아는 것을 나는 몰랐다. 기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고기가 자유롭게 바다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부레 덕분이다. 부레는 빈 공간에 불과하다. 그 비어 있음이 자유를 가능케 하고 세상을 품게 한다. 비어 있어야 남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을 마흔 훌쩍 넘어서 알았으니 죽기 전에 소설은 관두고 인간 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확하게 보고 단숨에 달려들어 적의 숨통을 끊는 맹수와 같이, 내가 던져진 세상이라는 것의 숨통을 찾는 것이 문학의 소임이라 믿은 적이 있었다. 젊음이 흘러간 지금, 제 자신과 타인의 못난 마음에도 오롯한 시선 줄 수 있는, 그리하여 못남조차 일순간이나마 반짝이게 하는, 그런 소설이라도 쓸 수 있으면 다행이려니 싶다. 낮에는 태양빛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하고, 때로는 달빛에 가리고, 그러던 어느 달 없는 밤, 외로운 누군가의 앞을 밝혀주는 산골 마을의 희미한 가로등이면 어떠랴. 그 순간 외로운 누군가에게는 태양보다 소중한 빛이 아닌가.
기댄 바 없다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니 무수한 것에 기대어 살아왔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눈 감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못난 딸을 떨쳐내지 못할 어머니, 위태로운 나의 행보를 때로는 엄중하게 때로는 따스하게 지켜봐준 신상웅 선생님, 전영태 선생님, 이동하 선생님, 살갑지도 않고 애교도 없고, 제멋대로인데다 불퉁불퉁 아픈 말이나 지껄여대는데도 오라비 같은, 언니 같은 너그러움으로 나를 품어준 김사인, 방현석, 김형수, 강금희 선배, 제대로 기댈 줄도 모르는 내게 미우나 고우나 한결같이 어깨를 빌려준 정남이, 윤희, 진경이. 무엇보다 시시한 나의 소설을 읽어준,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나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을, 그래서 가장 감사하고 무서운 독자들. 그들의 다정함과 때로는 남보다 더 무서운 채찍질이 나를 키웠다. 언젠가 그분들 얼굴 대면하고, 감사했노라고, 살갑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제대로 채우지도 비우지도 못한 지금으로서는, 더 높이 날든, 더 낮게 기든, 지금보다는 나아지기 위해 노력은 해보겠노라고, 감사의 말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2008년 봄
정지아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