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코가 어이없었던 건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아내되는 사람에게는 큰일이겠지만 이 남자가 누구와 정을 통하든 스미코는 아무 상관없었다. 정신이 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공공장소에서 갖춰야 할 자제력이 결여된 이 남자의 뻔뻔함 때문이었다. 주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자기 목소리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줄 아는지. 첫 통화는 무뚝뚝하게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내버렸으면서 남자는 이제 헤벌레한 얼굴을 하고서 느긋하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물론 스미코에게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가 하도 곧이곧대로 대답하는지라 대화 내용이 쉽게 짐작됐다. 이를테면 전화기를 들자마자 축축한 목소리로 거들먹거리면서 “그럼, 잘 다녀왔지”라고 중얼거린 것은 상대의 첫마디가 “잘 다녀왔어요?”였기 때문일 테고, 뒤이어 그야말로 신이 나서, 그래도 일단 나지막한 음성으로 “나도야”라고 대답한 건 보고 싶었다느니 외로웠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와 하모니카」중에서
후미히코는 우두커니 서서 평화로운 실내를 둘러보았다. 아내는 후미히코에게 등을 보인 채 자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후미히코가 지금 선 자리에서 보면 단지 이불이 봉긋하게 솟아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정적.
후미히코는 자신이 비할 데 없는 냉철함을 되찾은 양 느낀다. 리에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던 세상과 이곳은 어쩌면 이리도 분위기가 다른지.
그리움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위화감에 가까운 압도적이리만치 신선한 감각이었다. 낯선 여자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후미히코는 잠든 아내를 내려다본다. 어떤 액세서리를 좋아하는지, 일본주를 몇 잔 마시면 취하는지, 미용실에는 얼마 만에 한 번씩 가는지, 어떤 농담을 좋아하며 신발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여자다. ---「침실」중에서
비가 바다 표면을 때리는 소리, 젖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어루만지는 감촉, 파도와 빗줄기를 모두 거치고도 여전히 따스했던 남자의 몸―.
거기까지 떠올리고 시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기억은 세세한 부분까지 선명하고 생생하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버렸다.
이미 백 번도 넘게 생각한 것을 시나는 또 생각한다. 일요일.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에어컨을 켜두어서 방 안은 시원하다. 주말을 이용해 읽으려고 싸들고 온 자료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테이블에 던져놓았다. 한구석에 놓아 둔 지구본과 천구본(남자가 준 선물)에는 시트를 씌워놓았고, 그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오브제처럼 보인다. 혹은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이 방안에서 남자와 직접 연관된 물건들이 눈에 띄는 게 시나는 죽기보다 싫다.
그렇긴 해도 그 여행은―. 시나도 못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긴 해도 그 여행은 감미로웠다, 라고. ---「늦여름 해 질 녘」중에서
“무슨 뜻이야?”
그렇게 물은 까닭은 바로 얼마 전에 벌인 말다툼의 앙금이 아직 덜 풀린 채 내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피운 것을 여행으로 때우겠다고?”
내 말에 마누엘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누엘의 바람―이랄까, 모든 사람에게 발휘되는 애정―은 어제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사람들에게 그 매력을 나눠주는 것을 거의 의무처럼 여기고 있다. 그는 절대 아끼지 않는다. 말도, 웃음도, 우정도, 자신의 육체까지도. 그러한 행위가 때로는 나에 대한 배신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아예 못하는 모양이다.
왜? 어째서 그게 배신이 되는데? 내가 누구에게 애정을 주든 어차피 그런 내가 전부 너의 것인데.
속 좁은 내가 문제겠지. 속 좁고 편협하고, 음울하고 질투심 많은 루이스. 운전석에 앉은 이 남자와는 확연히 다르다.
---「알렌테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