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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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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 | 2017년 12월 1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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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1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326g | 122*188*20mm
ISBN13 97911581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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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의 기린’은 아직 못 만나보았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의 기린과는 다른 화요일의 기린. 기린의 화요일에 대해선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무료하고 심심한, 신기할 것 없는 일상 속의 하루일까? 밥을 먹고,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고, 짹짹거리는 참새들을 바라보고, 물을 마시고, 급하지 않은 보폭으로 걷고, 가끔은 하품을 하는 하루.
---「화요일의 기린」중에서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릴 때 만나 오래도록 한 사람 곁을 지켜온 연인 사이에는 종종 그 사실이 망각되는 것도 같다. 한쪽 손목에 상처가 생긴 것을, 상처가 깊어지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상처를 들여다보려면 끈을 풀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려워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견딜 수 있다고,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득 벌겋게 부푼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는 때가 온다. 내 살갗이 아닌 것 같아서, 낯설어서 놀란다. 한쪽의 일방적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중에서

그러고 보면, 때마다 늘 내 발목을 잡은 건 ‘이런저런 이유’들이었다. 내가 떠나면 남겨질 것들에 신경쓰여 제대로 떠나지 못했다. 떠났다가도 오래지 않아 되돌아오곤 했다.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가졌다.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전에, 친해지고 나서 아주 오래 뒤에 겪을 일까지 미리 추측하여 염려하기도 했다.
---「안과 밖」중에서

일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일 년 후의 삶이 까마득한 암흑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게 모두 ‘그 사람과의 관계’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내 탓’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가장 가까운 옆 사람과 헤어지면 내가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지상의 유일한 방」중에서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생활 속으로 돌입한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범속한 일상들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공동의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그 세월의 더께 속에서, 실은 두 사람이 최초에 무척 특별한 감정으로 맺어졌던 관계임을 상기할 여력은 사라진다. 욕실의 타일 줄눈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커피 두 잔」중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쓰지 않으면, 한 땀 한 땀 꿰매지 않으면, 어떤 소설도 완성되지 않는다. 이것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주는 진술이다. 무엇을 써도 백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절망적이고, 모든 작가들이 공평히 이 백지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이미 출간된 지구의 모든 소설들은 최초의 순간, 완벽한 공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쓰기로 결심한 이상, 지리멸렬하게, 서서히 결여를 메워가는 것 말고는 누구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에 관하여」중에서

가족 사이의 문제 역시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 역시 자꾸 잊는다. 보통의 인간관계라면 섭섭하고 속상하고 상처받았다가도 너무 어렵지 않게 털어내거나 잊는데, 혈육 사이의 문제 앞에선 유독 다른 상태가 되곤 한다. 더 섭섭하고 더 속상하고 더 상처받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다가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폭발해버린다.
---「장미」중에서

완전히 녹지 않은 채 도심 길가 한편에 아무렇게나 쌓인 눈의 형상은 ‘한순간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것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한순간 아름다웠으나 한순간 깨끗하게 소멸하지는 못한 것들, 구질구질하게 남겨졌다가 결국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들의 남루한 운명 말이다.
---「눈+사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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