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 된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도 하고, 이제 곧 헤어진다는 이유로 모든 잘못을 용서받으려고 한다. 보내는 사람 역시 누구나 이기적이 된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이유로 아픔을 혼자 떠안고, 이제 곧 헤어진다는 이유로 모든 잘못을 용서한다. 떠나는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남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코끼리는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렸을 때, 무리를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하다. 과연 인간은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홀로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숨쉬기 힘들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방망이질치고 호흡이 가빠졌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공포로 인해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엉겁결에 문 옆의 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죽는 것일까? 왜 나만 반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구에게도 따질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차분하게 내 얼굴을 바라본 것이 얼마 만일까? 여드름이 덕지덕지 났던 중학생 시절 이후 처음이 아닐까?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울이 아닌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은 어느 누구도 내가 고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 p.16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줄 몰랐어.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가슴 두근거린 순간, 어처구니없이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듯한 심정이야. 인생도 영화도, 내 멋대로 기대를 했기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내 인생이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거, 아직도 남의 일 같아. 입으로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하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더군. 하지만 몇 시간마다 공포가 밀려오기도 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아침에 세면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봤을 때, 역 플랫폼에 서 있을 때, 휴대전화로 일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불시에 공포가 밀려오는 거야.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다리가 덜덜 떨린다고.” --- p.40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다. 내 인생이 이런 것이었다고 확실히 알고 싶다. 인간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인생을 주마등처럼 되돌아본다고 한다. 아니, 주마등이 아니라 더 느긋하게 되돌아보자. 남은 6개월을 아낌없이 투자해서 내 인생에 관련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자. 그것이 남은 6개월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6개월이 짧다고 한탄하는 짓은 그만두자. 그런 번뇌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다.
2005년의 막이 오르면 내 인생에 관련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유서를 전하자. 유서는 편지가 아니라 대화라도 좋고, 눈빛이라도 좋고, 생각만이라도 좋다.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 방법으로 유서를 전하자. 나는 커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유서를 남기고 싶은 사람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 p.49
한밤중에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기침을 했다. 너무도 괴로워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자, 새하얀 시트 위에 혈담이 떨어졌다. 나의 목숨은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 나는 옆 침실에서 자고 있는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수건을 물에 적셔 시트에 묻은 혈담을 닦아냈다. 세면장에서 등을 구부리고 피를 닦아내는 내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갑작스레 한심한 생각이 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리고 그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말로는 아내에게 고통을 나눠주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있자 허리 주위가 차가워졌다. 지금 물수건으로 닦아낸 부분의 물기가 잠옷에 스며든 것이리라., 눈을 감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확대되었다. 이대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초리에서 넘친 눈물 한 줄기가 귀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p.100
“내 이기심이라고 여겨도 상관없지만 난 당신이 하루라도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침대에 묶여 있더라도, 의식이 없어지더라도…….”
아내의 마음은 가슴 아플 만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순간, 아내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이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호흡마저 멈춘 듯했다. 이대로 아침이 되는 게 아닐까 여겨질 만큼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시간으로 따지면 2~3분 정도였을지 모른다. 옆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당신이…… 없으면…… 난…… 난…… 어떻게…… 하지?”
죽을힘을 다해 짜내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66
“후지야마! 솔직히 말하면 오늘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들어서 마음이 무거워.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자네는 동정하지 말라고 하겠지. 그래서 생각해봤어. 내가 자네라면 무엇을 원할까 하고…… 그랬더니…….”
“그랬더니?”
“생각났어, 내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친구가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지.”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데?”
나는 반대 상황에 있는 것처럼 물었다. 이시카와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 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줄게.”
다음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기운이 내달리고, 심장이 세찬 종을 쳤다. --- p.241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세계에서 내 의식은 새로이 눈을 떴다. 육체와 동떨어진 정신의 세계, 이것이 죽는다는 것일까?
코끼리는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렸을 때, 무리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자신의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미련을 끊고 싶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고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자 모습을 감출 수는 없다. 고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자 모습을 감출 수는 없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고 싶다.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박수를 받고 싶다…….
---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