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범의 유전자
아이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이셀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바로 아빠 때문에……. 통신판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셀은 상사와 동료의 눈총을 받으며 틈틈이 동반 자살 사이트에 접속한다.
체육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다. 윗몸 일으키기와 피구 때문만은 아니다. 체육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빠의 범죄를 일깨워 주는 기념비 옆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푹 숙이고 잽싸게 모퉁이를 돌아 체육관으로 들어가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늘 그렇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쳐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체육관 외벽에 걸린 커다란 접시 크기의 은패가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꼴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400미터 단거리 경주 챔피언 티모시 잭슨을 추모하는 은패를 보고 나면 늘 숨이 턱 막혔다. 랭스턴 시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할 뻔했던 티모시 잭슨이 열여덟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을 모두에게 알리는 명판이었다.
그 명판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티모시 잭슨을 죽게 한 사람이 우리 아빠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지역 올림픽 꿈나무를 무참히 짓밟은 그 유명 인사가 바로 우리 아빠였다. --- pp.24~25
죽어야 하는 이유
또다시 자살 사이트에 접속한 아이셀은 로만에게서 온 메시지를 발견한다. 다음 날 ‘루트비어’라는 카페에서 만난 로만은 너무나 잘생긴 데다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다. 도무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얼마 뒤, 로만은 오하이오 강 위쪽의 절벽을 자살 장소로 점찍어 두었다며 아이셀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자신의 부주의로 욕조에서 익사한 동생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기도 물에 빠져 죽기로 결심했다나. 그제야 아이셀에게 로만의 슬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로만은 나무 탁자 위로 올라가 앉았다. 나도 그 애를 타라 올라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늘은 어느새 흐릿한 남색으로 물들었다. 켄터키 주 3월의 해질 녘은 늘 똑같았다.
“그 애가 죽은 후로.”
“누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자동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 여동생. 고작 아홉 살이었어.”
나는 엄지손톱 주변의 살을 깨물며 로만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로만을 무릎을 세운 뒤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중략]
“그 앤 나 때문에 죽었어.”
그 애에게서 짐승이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로만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느 날 밤…… 내가 그 애를 돌보기로 했어. 명확히 말하자면 그 애를 돌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 ……여자 친구가 집에 와 있었거든. 매디, 그러니까 내 여동생이…….”
로만은 얕은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혹시 울음을 터뜨리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열 살 이후로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안의 시커먼 구멍이 내게 남아 있던 눈물까지 모조리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 pp.94~95
슬픈 웃음
로만 엄마는 아이셀을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는, 마침내 아들에게 친구가 생겼다며 기뻐한다. 사실 로만은 동생의 첫 번째 기일인 4월 7일에 자기가 계획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엄마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셀은 로만 엄마가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보는 순간, 그만 식욕을 잃어버리고 만다.
식탁이 온갖 음식으로 꽉 찼다. 포도잎말이, 양고기와 닭고기 케밥, 여러 종류의 볶음밥, 그 옆에는 요구르트 소스를 비롯해 로만을 위해 할라피뇨 고추를 담아 놓은 작은 접시도 있었다.
이걸 다 준비하는 데 몇 시간은 걸렸을 터였다. 전부 다 맛있어 보였다. 그런데 양고기를 한입 베어 물려던 순간, 갑자기 식욕이 확 사라졌다. 로만 엄마의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머지않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로만 엄마를 생각하자, 먹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로만 엄마가 나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애를 썼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우리 집에서도 여태 이런 대접은 받아 보지 못했다. 로만 엄마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음식 맛이 어떤지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 희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로만 엄마는 새 친구를 사귄 것도 모자라,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아들을 보며 안도하고 있을 터였다.
양고기를 차마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볶음밥 속에다 밀어 넣었다. 그리고 대신 죄책감을 목 너머로 꿀꺽 삼켰다. --- pp.141~142
우리들의 첫 키스
아이셀은 로만에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로만이 그 일을 알게 되면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죽기 전에 아빠를 꼭 만나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로만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로만은 아빠가 저지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을 기꺼이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죽고 싶은 진짜 이유를 로만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아빠가 누군지 로만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웠던 건 로만이 나와 함께 죽는 걸 거부할까 봐서가 아니었다. 그걸 듣고도 여전히 나와 함께 죽고 싶어 할까 봐,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봐 겁이 났다.
어쩌면 로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변덕쟁이다. 로만을 만나고 나는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상처 입은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픔을 나눴다. 우리를 치유할 방법이, 우리가 서로를 구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커졌다.
전에는 모든 게 다 끝이라고, 피할 수 없는 거라고, 모두 다 예정된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삶에는 놀랄 거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기 시작했다. 어쩌면 모든 게 상대적인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이 이론화한 빛과 시간 말고도 상대적인 건 많았다. 이를테면 인생이 너무나 끔찍하고, 어떻게 해도 해결이 안 될 것처럼 보이다가도, 우주가 약간만 움직여서 관측점이 조금만 바뀌면 갑자기 모든 게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