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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꿈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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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꿈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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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152*225*30mm
ISBN13 9791192828350
ISBN10 1192828356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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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리에 누워 몸을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들은 곁에서 고운 단잠에 빠져 있었다. 동생들의 숨소리는 낮게 가라앉은 밤의 적막을 흔들어대었다. 방 안에는 농밀한 어둠의 입자들로 가득했다. 그는 큰대로 누워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길은 있는 것이여.” ‘순임아, 네가 말한 대로 나는 못생겼다. 그래서 나는 니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 니가 싫다고 허면 나는 니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니께 그렇게 알고 있거라잉. 못생긴 사람은 아나운서가 되어도 별 볼 일 없다고 허드라. 그래서 그 꿈도 포기헐란다. 지금은 이광재, 임택근 시대가 아니니께 말이여. 순임이, 너는 모를 것이다잉. 내가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여. 작가가 되는 디는 얼굴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기나 허냐.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되지 않을란다. 그게 싫단 말이시. 글먼 뭐가 되고 싶냐고? 궁금허냐? 나는 판사가 될란다. 공부는 잘허니께 가능허겄지야.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허면 되지 않겄냐.’

산외에서 태인까지는 버스로 50분 거리이다. 통학 거리치고는 꽤 먼 거리이다. 그는 일찍 밥을 먹고 나와 첫차를 기다렸다. 마을 앞에서 서성이며 한참을 기다리자 버스가 종산리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입학식 첫날의 등굣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던가. 입고 싶었던 검정 교복과 쓰고 싶었던 검정 교모.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까만 자기 모습을 위아래로 내리훑었다. ‘내가 이 교복을 입기 위해 면사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고생헌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구만. 내가 면사무소를 그만두었으니께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직사허게 고생헐 것인디 말이여. 세상은 불공평허다니께. 똑같은 사람인디 누구는 괄시 받고 누구는 아부 받고 말이여.’ 버스가 와서 멎었다. 차내는 헐렁하게 비어 있었다. 그는 버스 가운데 부분에 앉았다. 차창에는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손등으로 쓱 문지르자, 바깥 풍경이 손바닥만 하게 다가왔다. 키 재기를 하는 산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사라졌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다. 팔을 엇걸어 팔짱을 끼고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썹 같은 저 달이 점점 가늘어지다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도 시나브로 쇠약해져가다 결국에는 죽고 말 것이구만. 마지막 잎새가 뚝 떨어지듯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갈 것이랑게. 그럼 내 영혼은 하늘을 훨훨 날아 저 반짝이는 별이 될 것이라구. 별이 되어 밤이면 밤마다 깜박거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라구. 처량허게 슬피 우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보기나 헐까. 나는 슬픈 존재라구. 마냥 눈물만을 흘리며 죽는 날을 기다려야 헌다니.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얼마 동안 슬퍼허다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랑게. 내가 죽어도 이 세상은 변화가 없을 것이여. 나만 바람처럼 없어진다니께.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의 존재는 티끌과 같다구.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나는 사라져가고 있다니께. 죽어가고 있단 말이시. TV에 나오는 개그와 대중가요와 광고 방송과 멜로 드라마와 그런 것들은 내가 죽어도 여전히 그 자리 거기에서 흘러나올 것이라구. 죽음이란 이처럼 비참허고 슬픈 것을! 한 줄기 푸른 달개비, 연약혀 보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인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생명이 있는 것이면 모두가 아름답게만 보인다. 위대허게 보인다니께. 나무와 풀과 새와 잠자리와 사자와 두꺼비와 지렁이와 그런 모든 살아있는 것들. 귀허고 천박함을 떠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위대허게 보인다니께.’

발령장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자 멀리 산 밑에 웅크리고 있는 흰 건물이 보였다. 그는 그곳이 부임해야 할 학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 내렸으므로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육청 장학사가 말했던 대로 무창리는 용인의 산골이었다. 버스 정류장을 중심으로 주위가 온통 산이었다. 버스가 하루에 네 번 들어간다고 했으므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산골이었으므로 그는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꼭 깊은 동굴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벽처럼 둘러싸인 산들로 인하여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산골이라 공기는 맑겠지만 전후좌우에 버티고 서 있는 산들로 인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콱 막힐 것 같았다. 산골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자랐지만, 고향보다 더 깊은 산골로 여겨졌다. 발령받자마자 사표를 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렇다고 그는 사표를 낼 수도 없었다.

그 무렵 그는 관양동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았다. 소설에 빠져 새로 부임해 간 학교의 어린이들 문학 지도는 소홀했다. 심신이 피로한 탓인지 아이들의 글을 보고 하나하나 지적해 줄 수 없었다. 수업을 끝내고 나면 몸이 나른하고 피로하였으므로 아이들 글짓기 지도에 눈 돌릴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원고지 쓰는 법도 지도하지 않았다. 집에서 밤늦게까지 원고지와 씨름한 후 무거운 몸으로 수업을 끝내고 나면 그는 물 먹은 종이처럼 퍼져 있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흐물대다 퇴근하여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책상 앞에 앉아 원고지와 사투를 벌였다.

호선국민학교에 있는 두 개 파의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비노조파는 학교 운영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층이었고 노조파는 그 주도권 세력이 행사하는 학교 운영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비판 세력이었다. 비노조파에는 40대 이후의 중진급 이상 되는 교사들이 많았고 노조파에는 20∼30대 젊은 교사들이 많았다.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비노조파는 현재의 학교 운영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면서 노조파 교사들이 표방하는 교육 노선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거부감을 갖기로는 노조파 쪽에서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노조파 교사들은 현재와 같은 교육 방법으로 21세기에 적응할 능력 있는 인간을 길러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며 학교 관리자를 당혹스럽게 하였다. 예를 들면 담임이나 사무 배정에 있어 편파적으로 권한을 행사한다면서 민주적인 학교 운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담임이나 사무를 맡을 수 없다고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국가적 차원의 교육 재정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며 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경찰서 밖으로 나오자, 아침 해가 동녘 하늘에 둥실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불안스레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질주하는 거리의 차들이 어지럽게 지나쳐 갔다. 강소주만 마신 탓일까. 뱃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공복감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무력감이 찾아와 걷기가 힘들었다. 또한 뱃속이 느글거리며 자꾸만 헛구역질이 솟았다. 사거리에는 신호 대기에 걸린 차들이 딱정벌레처럼 엎드려 있었다. 그는 왼쪽으로 꺾어 명학역으로 가는 인도를 따라 걷다 담장 벽에 대고 토악질을 해대었다. 웅크리고 앉아 목을 길게 뽑고는 끄윽끄윽 토해내자 누런 분비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위 벽을 손톱으로 할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는 뱃가죽을 움켜잡고는 잠시 담장 벽에 기대앉아 동녘 하늘을 응시하였다. 아침 해와, 그 해를 받쳐주는 산과, 산 위에 포진해 있던 누런 구름들과, 우뚝 솟은 아파트들이 흔들려 보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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