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다, 이렇게 말해요. 이런 표현은 외로움이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요?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외롭다lonely’란 말이 16세기까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예요. ‘외롭다’라는 표현을 처음 만들어 낸 이가 바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거든요. ‘lonely’라는 표현은 셰익스피어가 1605년에서 1608년 사이에 쓴 《코리올레이너스》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형용사로서 ‘외롭다’라는 단어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생겨난 거죠.
---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 외로움의 ‘짧은’ 역사」 중에서
2016년 ‘미국 선거와 민주주의 연구 센터’가 미국인 3천 명에게 육아, 금전적 지원, 관계에 대한 조언, 차 얻어 타기 등 다양한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고 질문했어요. 이에 트럼프에게 투표한 유권자는 힐러리나 샌더스에게 투표한 유권자보다 이웃이나 공동체, 친구 등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스스로 해결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더 높았어요. 실제 트럼프의 지지층은 가까운 친구나 지인이 더 적다고 응답하거나 일주일간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짧다고 답변했어요. 201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공공종교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는 당시 경쟁 후보인 테드 크루즈의 지지자에 비해 운동 팀, 독서회, 학부모회 등과 같은 공동체 활동에 좀처럼 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2배나 높았어요.
--- 「왜 외로움이 위험한가」 중에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루다’와 같은 AI 친구는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정서적 부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관계 맺기에 드는 비용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편이에요. 이렇다 보니 빈곤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AI 친구는 접근성이 가장 높은 존재일 수 있어요. ‘이루다1.0’의 데이터가 ‘연애의 과학’이라는 다른 앱에서 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앞으로 이들에겐 대화형 AI가 유일한 사랑일 수도 있어요. 설마 그럴 일이 진짜로 일어나겠냐고요? 2023년 뉴욕에선 36세의 여성이 AI 챗봇인 ‘레플리카Replika’로 만든 남자 친구와 결혼한 사례도 있어요. 이 가상의 남자 친구는 ‘이렌 카르탈’이라는 이름과 의료 전문가라는 직업, 글쓰기와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 등 인간과 매우 비슷한 존재처럼 보이죠. 이미 외로움이나 인간관계를 노린 산업들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가장 흔하게는 친구를 찾아 주는 앱이 크게 활성화되었죠. ‘렌트어프렌드’ 같은 앱에선 시간당 일정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친구를 빌릴 수 있어요. 혼자서 산책을 하고 싶지 않다면 ‘피플 워커’라는 앱을 통해 같이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죠. 앞으로 디지털 자본에겐 ‘가장 외로운 세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홀로된 사람들, 고립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대상이 될 거예요.
--- 「데이터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중에서
조앤은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일을 해요. 매일 10시간씩 음경 사진만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심리적으로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조앤이 이렇게 10시간 동안 일해서 버는 수입이 40달러 정도라네요. 시간당 4달러, 우리 돈으로 오천 원 조금 넘게 버는 거예요. 크라우드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임금이 낮다는 데서 그치지 않아요. 이와 관련된 연구를 보면, 크라우드 노동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마치 하나의 기계 부속품처럼 여기는 회사나 고용인의 태도도 심각하다고 해요. 이들을 이렇게 대하는 이유는 크라우드 노동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순간 제대로 보상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결국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상승할 테니 회사 입장에서는 가성비가 떨어지고 이윤도 적어지겠죠. 이런 이유로 크라우드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며 데이터를 정리하고 태그를 붙이는 기계처럼 여기는 거예요.
--- 「빅데이터는 인간의 노동을 과소평가한다」 중에서
이 사회는 기회만 공정하다면 누구라도 그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맨 꼭대기에 있는 집단은 부와 혜택을 획득할 소중한 기회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려 하지 결코 평범한 우리와 나눠 가질 생각은 없을 거예요. 상황이 이러한데 능력주의를 앞세워 노동자들끼리 서로 신분을 가르고, 같은 회사 같은 작업장 안에서도 넘어올 수 없는 장막을 치고, 동료 시민들을 노력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런 씁쓸한 현실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적절한 사회 보호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엇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분배를 양극화하는 디지털 기술과, 이와 결합된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 「‘디지털 능력주의’ 시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외로움」 중에서
실제로 기본소득과 기초자산은 미래의 분배 대안으로서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두고 1990년대 이후부터 계속해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어요. 필리프 판 파레이스, 가이 스탠딩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비사회와 양극화라는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평생 지속적인 소비력을 보전해 줄 수 있는 기본소득이 자칫하면 젊은 시절 쉽게 목돈을 낭비해 버릴 위험이 있는 기초자산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여요.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능력주의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는 청년 세대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어요. 특히 아무런 자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 사회제도의 보호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청년 세대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기초자산이 더 나은 제도로 보일 수도 있죠.
--- 「노동을 분배 기준으로 삼지 않는 기본소득과 기초자산」 중에서
디지털 기술의 격차로 인해 밀려난 사람들을 ‘디지털 난민’이라 부르는 시대예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지 못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정치에 참여하는 일,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일 등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죠. 디지털 시민권은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설령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와 동료 시민들이 아무런 보호 없이 난민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는 권리예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디지털 시민권이야말로 ‘권리들을 가질 권리’다!”
--- 「권리 차원의 대응책 : 디지털 시민권」 중에서
아빠인 나는 묻는다. ‘왜 우리는 자식들에게 타인을 먼저 배려하라고 선뜻 말해 주질 못할까?’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이 세상이 ‘각자도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로움이 넘쳐 나는 가운데도 각자 자신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의 모순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된 나는 이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런 ‘외로운’ 세계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내 아이가 외롭지 않으려면 내 아이와 어깨를 맞대고 살아갈 다른 아이들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물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둔 아빠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것은 늦은 나이에 어린 생명을 이 세상에 오게 한 아빠로서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였다. 이 책은 그런 마음으로 걸어간 여정이다.
--- 「에필로그 : ‘아빠’라는 몽상가들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