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은 몹시 힘든 날에는 덫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어리석고 무례하고 괴팍한 남자와 함께하는 비참한 삶에서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나발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율법과 의무 안에서 그에게 매여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달아나는 대신 남편과 집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 p.35, 「아비가일」중에서
인내는 우리에게 고통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약속하셨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짐이 달라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p.75, 「아비가일」중에서
룻다는 주요 교차로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상인들과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정하곤 했다. 마을 광장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요한 마가는 교차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고 느꼈다. 그는 인생의 교차로에 서 있었다. 각각의 길이 그가 여행할 수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중 하나만 올바른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는 그의 실패가 자기 잘못 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능력 부족이나 외부 상황에 의해 실패했을지 몰라도, 자신은 그런 이유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요한 마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이 영혼이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할 때임을 알았다.
--- p.119, 「요한 마가」중에서
요한 마가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우리에게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으며, 우리는 실패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배움의 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알려 준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바꾸고 싶은 상황들이 있겠지만, 어제는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내일은 진정한 성공을 위한 신성한 계획의 일환이다.
--- p.134, 「요한 마가」중에서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아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아실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실 거예요.”
그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방인이 대답할 때,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당신과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 p.178, 「사마리아 여인」중에서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그녀는 자비와 이해가 어떤 것인지 경험했고, 그녀의 삶이 어떻게 내면에서부터 변화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가르침은(요 4:39-43)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불러왔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엉망이 된 삶은 예수님 덕분에 이미 변화하는 중이었다.
--- p.207, 「사마리아 여인」중에서
그는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비탄에 빠뜨릴 거짓말을 지어내는 데 일조했다. 다말에게 야비하게 군 오늘이나 그때나 그는 유죄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늘 아버지가 죽은 아들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보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더디게 새벽을 향해 나아갈 때, 유다의 깨어진 심령은 신음하며 회개했다. “미안하다, 다말. 죄송해요, 아버지. 그리고 요셉… 정말 미안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바람은 그를 과거로 돌아가게 할 수 없지만… 용서는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뉘우치는 모습을 보시고, 그의 안에 변화를 시작하셨다.
--- p.235, 「유다」중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고후 5:17).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렇게 믿고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죄에서 돌이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 p.284, 「유다」중에서
“제 눈으로 직접 주님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 구원은 옛 선지자들의 말처럼 만민에게 예비된 것입니다.”
시므온은 다시 품 안의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 구원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 p.316, 「시므온과 안나」중에서
시므온과 함께 기뻐하던 안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메시아는 아직 갓난아기였지만, 언젠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원할 터였다. 그리고 이 현명한 노인들은 평화가 전쟁이나 정치를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짜 전투는 영토나 권력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한 무언가가 있었다.
--- p.318, 「시므온과 안나」중에서
하지만 언젠가 시므온과 안나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 초기에 우리를 부르시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도 노화를 피할 수 없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날이 다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므온과 안나는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것도 없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 p.321, 「시므온과 안나」중에서
시므온과 안나의 분투는 노화에서 비롯된 신체적 제약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자연은 노화에 관한 한, 특히 기억과 관련한 부분에서, 무엇보다도 치매로 알려진 뇌 질환의 다양한 형태와 관련해서 자비롭지 않다. 어쩌면 시므온과 안나도 노쇠한 몸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대기실에 앉아 있는 것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노년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은 나이 들어가는 데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인생 후반기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의 예를 제시한다.
--- p.322~323, 「시므온과 안나」중에서